고등학생이 바라본 인간다움

감정의 지배

by nuveeza

나는 여가 시간에 유튜브를 보곤 한다. 어쩌면 주말은 항상 그렇게 보내온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제목에 드러났다시피, 어느 날인가부터 찾아오는 공허함을 통해 사람들에게 내 상처를 알리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놀러 가거나 사람들과 하던 이야기가 줄면서, 중학생이었던 나는 이제 과묵한 고3이 되었다. 한번 적응하니까 눈앞에는 사람이 있는 것보다 모니터가 편해지고,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당연해졌다. 남들과 부딪힐 게 없으니 주위에서 욕도, 칭찬받을 것도 없다. 웬만해선 그 누구도 멋쩍어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다 든 생각이 있다. 쉬는 청년이 많아진 건 그들은 보다 큰 야망이 필요 없는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취미를 대신할 영상을 찾는 게 스스로 즐기는 것보다 훨씬 확실하고 빨라진 세상이다. 혹여나 내 이야기를 들어줄 가족과 친구가 바쁘다면, 이젠 인공지능과 상담도 가능하다. 다른 대책이 이미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슬슬 거북해지고 있지 않은가? 역사가 생각하는 인간다움과, 자라오는 학생들의 인간다움은 점차 거리감이 생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를 단순히 인간다움의 세대 차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기억이란 건, 대부분 과거에 느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어제 가족들과 외식을 했다' 이런 것이 기억이다. 기술이 발달하며 우리의 기억은 이제 어렵지 않게 불러올 수 있다. 브이로그는 재미를, 뉴스는 화를, 다큐는 흥미를, 노래는 슬픔을 저장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정보화 사회는 감정을 늘 등에 업고 있다.


이런 간접 경험을 가져다주는 플랫폼 중에 유튜브가 있다. 여기서 논점은, 태어날 때부터 미디어와 함께 자라온 세대는 상대방의 감정에 익숙한데 반해 나다운 감정을 발휘하는 것엔 미숙하단 것이다. '나' 대신 편집의 의도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세상과 직접 마주하기도 전에 걱정에 혼란스러운 친구들이 많다.


물론 청소년은 기억에 예민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에 이끌리는 어른들조차 이성을 챙기기 어렵기 때문에 계속해서 종교를 믿고 사회를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잃는 순간, 꿈과 잠재력이 저 깊은 곳에 가라앉는다는 걸 의식했다. 방법을 궁구하지 못하면 자신을 잃기 쉽다.


어디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사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지식은 내 환경 속에서 유용하게 쓰였다는 것뿐이고, 그 상황이 남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즉, 차선책으로써 미디어를 활용하는 습관은 자립할 힘을 채갈 수 있다. 그렇기에 특히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접 상호작용을 통해 학습을 해야 한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꿈이 무엇인지, 혹은 바빠서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닐지는 오직 나만이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수백 년 동안 어른들은 자신의 가면과 맞서 싸워 왔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다 한들 실수를 되풀이하던 인류가 자신도 모르게 인간다움의 막을 내린다는 건, 결코 어린 시절에 꿈꿔오던 미래가 아닐 것이다.


생각해 줄 사람을 찾기 전에 나 스스로 생각해 보자.

작가의 이전글나는 왜 이토록 삶이 즐거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