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아니야

뮤지컬 배우 류정한 헌정 후기북

by 누비

책을 한 번 써보고 싶었다.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글을 읽는 것도 문장을 엮어내는 것도 좋아하기에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꿈이리라 믿었다. 막연했던 꿈이 구체적인 목표로 이어진 계기는 사소한 결심이었고, 구체성을 획득한 목표는 적극적인 실행으로 이어졌다. 어려운 건 그저 그 최초의 결심뿐이었다.


지난 2015년에 연뮤덕이 된 이래로 퀄리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관극 후기를 빠뜨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수많은 후기들에 가장 많이 담긴 이는 단연 유일무이한 본진, 류정한 배우님이다. 2020년 첫날, 입덕 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한 걸 해보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이 바로 실물 후기북이었다. 오롯이 류정한 배우님의 공연만을 기록한 단 한 권의 책. 운명 같던 첫 만남부터 기적 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이와 경탄이 거듭되던 소중한 공연을 기억하기 위한 책.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함께했기에 충만하게 살아낸 5년을 담아낸, 그런 책.


티스토리 블로그에 남겼던 후기들을 모아보니 60만 자였다. 300페이지의 책이 목표였기에, 필요 없는 문장과 단어를 쳐내고 삭제하는 것만으로도 한세월이었다. 5년 전에 적은 감탄은 아쉬웠고, 3년 전에 기록한 감상은 기발했으며, 2년 전에 남긴 지나치게 상세한 디테일은 과했다. 5년은 짧지만 길었고, 관극이라는 강한 자극은 사람을 많이도 변화시켰다. 지우고 다듬고 정리하고 다시 쓰는 과정은 힘겨웠지만 행복했다. 기억을 돌이키고 추억을 곱씹으며 정성껏 영혼을 담아 한 장씩 뮤지컬 후기북을 완성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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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까지 갈 것도 없이 소량 제작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구성 양식이나 겉표지, 제본 및 지류의 종류까지 전부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어설펐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즐거웠다. 레퍼런스를 찾아보기도 하고 직접 충무로의 인쇄소에 방문하여 상담도 받으며 차근히 진행해나갔고, 마침내 기한에 맞춰 탈고하고 일정에 맞춰 출력까지 완료했다. 그렇게 내 이름이 적힌 최초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16만 자. 300페이지. 원고지 1,019장.

2015년 6월 2일부터 2020년 6월 7일까지, 5년 동안 12개 작품에서 만난 117회의 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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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어 환상이 아니야

무대는 곧 환상이다.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자, 객석을 나서는 순간 안개처럼 흩어져버리는 환상.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이 환상처럼 반짝이며 무대를 가득 채워내는 그 찰나가 형용할 수 없이 눈부시다. 공연은 찰나의 예술이다. 어떤 수단으로도 결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그 순간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한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경험. 유리병 속에 담아 간직할 수 없기에 고통스럽고,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해지는 기억이 안타깝지만, 그렇기에 더없이 소중한 그 모든 찰나들.


영혼에 선연한 흔적을 남긴 모든 순간들.


그리하여 용감하게 기록을 남긴다.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며 만끽한 모든 감정과 기억과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기억하기 위해. 감각을 되짚고 순간을 되살리는 과정을 통해, 무대 위에만 존재하던 이야기는 영혼에 흔적을 남기고 나아가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공연이라는 예술은 더 이상 머나먼 곳의 닿지 않는 무언가가 아니다. 하나의 세상으로써 수많은 인생들을 담아내는 무대는 명백하게 실재한다.


알 수 있다. 무대 위 세상은, 환상이 아니다.



덧. 책을 쓴다는 특별한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 류정한 배우님께 다시 한번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앞으로도 꾸준히 다양한 무대 위에서 멋진 세상을 안내해주시리라 믿으며, 그대만을 품고 따르겠나이다.


덧2. 여전히 관극 후기를 남기고 있는 블로그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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