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를 향해 달려든 어리석은 기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기상천외한 행동을 자행하는 이 기사의 이름은, 돈키호테. 확고한 자신만의 논리로 무장한 채, 세상을 남과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상을 좇아 꿈을 꾸는 자를 비정상이라 규정짓는 사회에서 돈키호테의 행실은 광기로 치부된다. 부조리에 대항하는 그의 용기는 비웃음거리가 되기 일쑤다. 그러나 꿈꾸는 자가 내뿜는 특유의 아우라는, 깊게 숨겨둔 타인의 꿈을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힘을 지녔다. 발을 딛고 선 현실이 어떠하든, 이상주의자를 마주한 인간은 잊고 지내던 꿈을 떠올리고야 만다. 그리하여 근대소설의 효시인 <돈키호테>라는 고전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그대, 꿈을 꾸고 있는가.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는 극의 인물들이 직접 극 속의 극을 연기하는 극중극의 형식을 지닌 작품이다.정의롭지 못한 모든 것에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의 내부에 담긴다. 저자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액자의 외부에 위치한다. 세르반테스는 극중극의 작가로서 돈키호테에게 이상을 투영하지만, 동시에 극의 주인공으로서 이상과 다른 현실을 맞닥뜨린다. 극과 극중극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에, 창작자의 통제를 받던 창작물은 역으로 창작자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결국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형제다. 객석까지 확장되어 공연장 전체를 아우르는 어두운 지하감옥의 문이 열리며, 극은 시작된다.
나는 나 돈키호테, 라만차의 사나이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개인은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 누군가는 극렬하게 저항하고, 어떤 이는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침묵하던 남은 다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불합리에 적응한다. 늙은 시골 지주인 알론조 키하나는 세상의 천인공노할 작태를 마주하자 의분으로 가득 찬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그만 머리가 텅 비어버리게 된다. 마침내 제정신 같은 건 놓아버린 그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세운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자기 자신을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라 칭하게 된 것이다.
들어라 비겁하고 악한 자들아 너희들 세상은 끝났다
기사를 자처하여 길을 떠난 돈키호테는 환상을 현실에 덧입혀 만들어낸 온갖 모험과 마주한다. 커다란 풍차를 거인이라 착각하여 결투를 청하고, 이발사의 낡고 평범한 세숫대야를 맘브리노의 황금투구라 호명하며 찬사를 늘어놓는다. 평범한 주막집을 성이라 말하며 기세 등등하게 들어서고, 여관 주인을 영주라 부르며 기사 책봉을 요청한다. 기사 임명을 받기 전 허영을 비워내기 위함이라며 밤새 철야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수많은 정신 나간 행각은, 한 여성을 성처녀라 칭하며 레이디로 모시겠노라는 탄성에서 정점을 찍는다.
돈키호테는 천한 이름의 '알돈자'에게 '둘씨네아'라는 고귀한 이름을 부여한다. 아름다움에 찬사를 쏟아내며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간청하여 전해받은 더러운 천 쪼가리를, 레이디가 기사에게 내린 징표라 여기며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돈키호테의 눈에 알돈자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이 고결하기에, 그를 위한 삶이야말로 영광이자 축복이라 굳게 믿는다. 실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망상을 늘어놓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가감 없이 조롱을 던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한편, 돈키호테라 자칭하기 전의 알론조 키하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속히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세간의 평판 걱정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이유를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오직 그분의 생각뿐이라는 위선을 떤다.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지닌 그들은 모두 푸른색 의상을 입고 있다. 반면 돈키호테와 같은 부류의 이상주의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태양처럼 붉거나 해바라기처럼 노랗다. 차갑고 냉랭한 인상과 따뜻하고 희망찬 이미지의 색감 대비는 극의 논지를 한층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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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을 일삼는 그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자들은, '미친' 돈키호테를 '고친다'. 스스로를 정상이자 정답이라 확신하는 오만함은, 비정상의 가치를 거리낌 없이 무시한다. 알론조 키하나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돈키호테'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거부 의사를 묵살하며 강제로 현실을 주입시킨다. 늙고 병들고 지쳐버린 실체를 마주한 충격은 굳건하던 의지를 무너뜨리기 충분한 고통이었고, 그는 일순간에 정신을 잃는다.
오 나는 모르겠네 내게 뭘 원하나, 둘씨네아
알돈자는 돈키호테로 인해 변화하는 사람이자, 극중극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기 전 알돈자의 삶은 희망 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일 뿐이다. 원하는 건 딱 하나인 추악함에 지겹도록 시달리며, 누구나 다를 것 없이 다 똑같다고 고통스럽게 부르짖는다. 어느 날 남들과 다른, 그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난다. 맘대로 휘두르고 괴롭히기는커녕, 그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대접한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대우에 당황한 알돈자는 그를 의심하고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돈키호테의 언행은 변함이 없다.
그대 만남은 기다림 끝에 영광
그래서 알돈자는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는 종자 산초에게 질문한다. 대체 왜 같이 다니느냐고. 이유는 간단하다며 즉답이 돌아온다.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설명도 안 되고 얻는 것도 없지만, 그냥 좋으니까 더 묻지 말라는 산초의 말에 알돈자는 황당해한다. 둘 다 미쳤다는 간단한 결론을 내버리면 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인다. 꿈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그들은 어디서나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왜인지 자신만큼은 비웃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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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에서 철야기도를 하던 돈키호테는 기도의 끝에 그의 레이디, 둘씨네아의 이름을 소중하게 덧붙인다. 알돈자는 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묻는다. 돈키호테는 그게 그대의 이름이기 때문이라며, 언제나 그대를 알아보았노라 답한다. 눈앞의 사실을 보지 않고 허무맹랑한 말만 늘어놓는 그를 이해할 수 없기에, 알돈자는 화를 낸다. 가득 차오른 답답함은 이내 참을 수 없는 궁금함이 된다. 주어진 길을 굳게 믿고 따르는 돈키호테의 의지는, 고된 삶에 짓눌린 알돈자가 감히 품어보지도 못했던 희망을 싹트게 만든다. 체념과 포기에 물들어 빛을 잃어가던 알돈자는, 돈키호테라는 계기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새야 작은 새야, 알돈자
돈키호테와 함께 예상치 못한 승리를 만끽하면서, 알돈자는 지긋지긋한 현실 속에서도 내면의 본질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인간의 악의에 대한 의심이 약해진 알돈자는, 그럴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라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잔혹한 현실은 가혹하게 그 믿음을 산산조각 낸다. 극한의 좌절을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알돈자에게 주어진 잔인한 폭력은, 윤간이다.
2015년에 진행된 한국 라이선스 10주년 공연까지, 해당 장면은 말 그대로 가감 없이 묘사됐다. 지나치게 길고 상세하며 적나라한 배우들의 행위는, 포르노라 명명해도 절대 과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오로지 자극만을 위한 연출은 몹시 불쾌하고 역겨웠다. 이 폭력적인 연출을 향한 항의와 수정 요구는,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가장 최근 시즌인 2018년 공연에서야 간신히 반영되었다. 아무리 유의미한 주제라 할지라도, 이를 표현하는 수단이 잘못된 이상 그 가치는 유효할 수 없다. 여성 캐릭터에게 부여할 수 있는 시련이 성폭력밖에 없는 것인지, 다음 시즌을 올리기 전에 반드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날 짓밟고 가는 건 참을 수 있으니 꿈꾸게 하지 좀 마
극악한 폭력에 휘둘려 만신창이가 된 알돈자는 돈키호테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애초에 희망 따위를 갖지 않았더라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분노와 체념으로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알아버렸기에, 끔찍한 현재를 마주한 순간 더욱 깊고 힘겨운 절망에 잠겨버리게 된다. 알돈자는 자신을 짓밟고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꿈을 꾸게 만든 돈키호테가 가장 잔인하다고 절규한다. 건넨 희망이 오히려 고통을 주었음을 알게 된 돈키호테는, 현실에 대항할 힘을 잃고 쓰러진다.
이상 없이 살 수 있는 용기 난 없소이다, 이룰 수 없는 꿈
앞서 언급했듯 돈키호테와 알돈자는 극중극의 인물들이다. 돈키호테를 연기한 것은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인 세르반테스다. 그리고 돈키호테의 주변 인물들은 다름 아닌 감옥의 죄수들이다. 생계를 위해 세무관 일도 겸하던 세르반테스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을 근거로 수도원에 세금을 추징했다. 이를 거부당한 그가 교회를 저당 잡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기에,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현재 세르반테스는 지하 감옥에서 종교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다.
지하감옥에 먼저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은 귀중한 원고를 비롯한 세르반테스의 모든 소지품을 압수하려 든다. 이상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감옥 안에서조차 기소를 당한 그는, 이상 없이 살 수 있는 용기가 없음을 시인하며 유죄를 인정한다. 곧이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연의 형태로 변론할 기회를 달라고 청하는 임기응변을 발휘한다. 군중의 분위기를 능숙하게 전환시킨 뒤, 참여를 유도하며 감옥 안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수염을 붙이고 갑옷을 입으며 분장과 의상을 갖추는 와중에, 서술자의 음성을 늙은 노인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바꾼다. 극 중의 세르반테스가 극중극의 돈키호테로 완벽히 분하는 순간, 무대의 죄수들은 물론이고 객석의 관객까지 다 같이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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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진실의 적이지
세르반테스는 주연배우로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또한 연출가로서 중간중간 죄수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행동과 대사를 지시한다. 때로는 해설자로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산초에게는 주막집이지만 돈키호테에게는 성으로 보인다는 사례를 들며,같은 것도 보는 눈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강조한다. 돈키호테로 상징되는 용기의 가치를 역설한 다음, 자연스럽게 그 역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생을 직시해온 경험을 반영한 세르반테스의 변론은 단순한 자기변호를 넘어, 참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작품으로써 실재한다.
우리 모두 라만차의 기사입니다, The Impossible Dream
알론조 키하나가 억지로 마주한 현실 앞에서 추락하자, 세르반테스는 이게 끝이라 고해한다. 배우이자 관객인 죄수들은 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발한다. 변론은 실패라며 미완성의 원고를 불태우려 한다. 시작은 그의 의지였으나, 함께 쌓아 올린 이야기는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종결을 선언할 수 없게 된 작가는, 결국 즉흥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한다. 압박 속에서 추가된 마지막 장면으로, 이야기는 비로소 완성된다.
/스포일러/ 혼절해있다 깨어난 알론조 키하나는 돈키호테로서 행했던 모든 모험이 그저 긴 꿈이었노라 생각한다. 충격으로 모든 기력이 다해 쇠약해진 그는, 찾아온 알돈자마저 기억하지 못한다. 이에 알돈자는 실망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이상을 노래하는 돈키호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그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들을 반복하며 되돌려준다. 돈키호테가 꿈을 꾸게 만들었던 알돈자는, 거꾸로 돈키호테가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돕는다. 마침내 알론조 키하나가 돈키호테로 돌아온 눈부신 찰나, 생명의 빛이 완전히 꺼진다. 남겨진 알돈자는 자기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고 인정한다. 내 이름은 둘씨네아예요.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극중극이 완성됨으로써 극의 시점은 지하감옥으로 되돌아간다. 만들어진 이야기는 만든 이에게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에, 이야기를 완성한 세르반테스와 죄수들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용기를 건넸던 세르반테스는 반대로 용기를 건네받는다. 돈키호테가 그랬듯이. 희망을 알지 못했던 죄수들은 의연함을 지닌다. 알돈자가 그랬듯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던 돈키호테의 독창은, 이룰 수 있노라 응원하는 알돈자의 선창에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꾸는 모두의 합창이 된다./스포일러/
오디컴퍼니 @od_musical
이 극은 꿈을 꾸고 추구하라 종용하고 독려하되,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말한다.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극중극의 돈키호테와 알돈자를, 극 중의 세르반테스를 지켜본 관객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다 마침내 머리가 텅 비어버리게 되면, 미친 세상이라는 풍차에 온몸을 던지며 달려드는 돈키호테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극 바깥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떻게 달라질지는 저마다의 몫이다. 따라서 다시 묻는다. 그대, 꿈을 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