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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Jun 01. 2019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시대에 뒤떨어진 히트작

선과 악이 완벽히 분리될 수 있는가. 분리된 악이 완벽히 통제될 수 있는가. 지킬 박사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선한 본능과 악한 본능을 분리할 수 있고, 분리된 악은 통제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과된 질문들이 있다. 분리된 선은 절대적인 정상인가. 온전한 선과 온전한 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모두에게 존재하는 선과 악이 완전하게 상충되는 개념인가. 오만한 인간은 올바른 대답 없이 실험을 강행한다. 독립적인 자아를 지닌 두 개의 정체성으로 분리된 선과 악은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한다. 분리된 선은 통제하지 못하고, 분리된 악은 통제되지 않는다. 분리된 선과 악은 평행선을 그리며 대립한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대표적인 남주 원탑극이다. 지킬/하이드의, 지킬/하이드에 의한, 지킬/하이드를 위한 이야기는, 배우의 역량과 해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웅장하고 강렬한 넘버와 화려하고 압도적인 무대는 관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러나 모든 장면에 담긴 연출의 사상이 케케묵었다. 성녀/창녀의 이분법적 여성상은 구태의연하다. 성매매, 성추행, 강간 등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폭력의 소상한 묘사는 가해자의 시선에 동조하는 포르노다. 시대착오적인 요소는 시대에 맞게 수정되어야 하고, 불필요한 폭력은 대체되거나 삭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만하게 과거를 답습하고 거만하게 비판을 무시하며 15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연출을 고집한다. 자기성찰에 근거한 변화나 발전이 부재하는 작품에, 과연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약속할게요 그댈 향한 내 길, I Need To Know


의사이자 과학자인 헨리 지킬 박사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연구에 몰두한다. 현명했던 사람이 단 한순간 어둠에 갇히는 이유를 밝히고, 온전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는 해답을 찾으려 한다. 가면 속의 허상에 담긴 이중성과 알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던 지킬은, 선과 악의 분리가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타고난 두 개의 성품에서 분리해낸 악을 통제한다면 인류의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지킬은 사람의 정신에서 선과 악을 분리해내는 치료제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가야만 해 그 숨겨진 빛을 향해
아무도 가지 않았던
오직 나만이 가야 할 험난한 길

오디컴퍼니 @od_musical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실험의 허가를 얻기 위해 지킬은 성 주드 병원의 이사회 앞에 선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노라 확신하며 자신의 분리 이론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상류층은 감히 신에게 도전하고 사회의 윤리에 반하는 그 위험한 발상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절대로 불가하다는 멸시와 비아냥을 마주하면서도 지킬은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당신들의 모습에 담긴 사악함을 보라며, 그 어두운 면을 분리하면 모든 악행을 통제할 수 있노라 끈질기게 설득한다. 단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간청은, 절대 반대를 선언하는 "네이(Nay)" 속에 파묻힌다.


견고한 위선과 굳건한 편견은 거대한 벽처럼 단단하다. 다수가 미치면 개인은 절대 제정신이 아니다. 저들이 의학이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아느냐 화를 내며 답답해한다. 자신이 본 미래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진절머리 나고, 지위와 안위만을 중시하는 위선이 역겹다. 자네는 너무 앞서갔다는 친구 어터슨의 위로에, 그럼 뭘 어쩌란 거냐며 절망에 잠긴 채 자리를 떠난다.


오디컴퍼니 @od_musical
오디컴퍼니 @od_musical


이어지는 장면은 지킬이 지각한 본인의 약혼식과 지킬이 방문한 레드랫 술집이다. 연구에만 몰두하는 지킬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귀족 아가씨 엠마. 유흥에 관심이 없던 지킬의 숨겨진 욕망을 일깨우고 자극하는, 술집 여자 루시. 점잖은 하얀 드레스의 엠마와 찢어진 붉은 치마의 루시. 성녀와 창녀라는 전형적인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두 여성은 오로지 도구로써 존재한다. 엠마에게 허락된 주체성은 고작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고, 루시에게 부여된 위치는 그저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다. 이토록 편협하고 평면적인 여성 캐릭터만이 지킬과 하이드의 갈등을 부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 시대의 연출가로서 자격이 없다.


또한, 대극장 극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창녀촌은 여성의 대상화를 보다 공고히 만드는 폭력의 재생산이다. 극의 배경이 19세기 영국이라 할지라도, 극이 올라오는 지금은 21세기 한국이다. 헐벗은 여성들이 천박한 동작과 자세로 유혹하고, 양복을 갖춰 입은 남성들이 즐거워하며 추파를 던지는 적나라한 장면이 반드시 필요한가? 화려한 춤은 불쾌하고, 유쾌한 박자는 불편하다. 여성을 눈요깃거리처럼 소비하는 연출은, 위선자에게 가하는 비판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증명하는데 그친다.



지금 이 순간, This Is The Moment


지킬은 헌신적인 엠마의 사랑을 알면서도 생경한 루시의 매력에 흔들리는 내면의 위선을 인지한다. 스스로의 감정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번뜩이는 순간, 지킬은 결단을 내린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이것뿐이다. 자기 자신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두려움과 번뇌는 연기처럼 멀리 사라져간다.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오로지 확신만이 남는다. 제 모든 것을 바치리라 결연하게 선언하며, 지킬은 꿈꾸던 이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오디컴퍼니 @od_musical


조용한 실험실에서 지킬은 본인에게 약물을 투여한다. 육체의 변화를 섬세하게 인지하며 꼼꼼하게 실험일지를 기록한다. 실험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지만, 다 잘될 거라고 애써 진정한다. 시간이 증명하리라 믿으며 기대에 찬 미소를 짓는 순간, 강력한 자극이 터져 나온다. 사납게 삼킬 듯이 파고드는 고통에 사로잡힌 채 온몸을 뒤틀고 바닥을 뒹굴면서 괴로워한다. 아픔에 짓눌린 날카로운 신음에 섞여 든 묵직하고 투박한 음성은 이내 목소리를 장악한다. 지킬의 내면에서 튀어나온 존재는 지킬과 완전히 분리된 정체성을 지닌다.



기대 이상의 발전 - 자유, Alive


새롭게 탄생한 존재는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근육 하나하나를 비틀듯 움직여본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농도 짙은 정적에 균열을 내는,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거울을 발견한다. 거울에 맺힌 상을 빤히 응시하며, 지킬과 명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깨닫는다. 오른팔로 상징되는 지킬의 저항을 왼손으로 막아낸다. 자정. 모든 게, 정상. 막을 수 없이 넘쳐흐르는 생생한 힘을 만끽한다. 살아 숨 쉬는 강한 느낌이 온몸을 지배한다. 헨리 지킬의 안에서 태어난 두 번째 인격은 바로 에드워드 하이드다.


악의 힘이 날 충동질해
악췰 풍겨라 부추겨라
악마가 돼라 거부하라
악명 떨쳐라 나는 에드워드 하이드

오디컴퍼니 @od_musical


하이드가 최초로 살해하는 자는 이사회의 일원인 주교다. 이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면의 연출 역시 끔찍하고 역겹다. 무려 미성년자 성매매를 자행하는 주교의 위선을, 굳이 자세한 행위와 대사를 통해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는가? 어린 소녀 역의 배우가 늙고 타락한 남성 역의 배우에게 겁탈과 희롱을 당하는 모습을 2분 가까이 마주하게 만든 장면은, 관객에게 가해진 폭력이다. 상황적 은유만으로 충분히 표현 가능한 범죄를, 마치 전시라도 하듯 묘사하는 연출의 가학성을 납득할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약자에게 가해지는 강자의 폭력을 왜 가벼운 농담처럼 다루는가. 주교에게 행하는 하이드의 심판은, 악을 더 강한 악으로 덮는 것에 불과하다.


오디컴퍼니 @od_musical


두드러지게 타락하고 부패한 이사회의 위선자들에게, 하이드는 냉혹하고 잔인한 죽음을 선사한다. 연달아 발생하는 살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으로 인해, 군중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죽지 않으려면 먼저 죽여야 한다는 집단적 광기가 팽배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지킬은 몸과 마음이 하이드에게 잠식당하고 있음을 통감하며, 그 괴물이 완벽한 은신처를 찾아냈노라 탄식한다.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그의 또 다른 내면은, 통제되기는 커녕 제멋대로 날뛰며 세상을 유린한다. 그럼에도 지킬은 하이드를 미워하지 못한다. 거부하거나 부정하려고 해 봐도 그럴 수 없다. 그가 바로 자신이기에. 억눌렸던 지킬의 악의와 욕망은 하이드를 통해 분출된다.



나는 지금 어디 헤매이고 있나, It's A Dangerous Game


자신을 멀리하는 태도에 힘겨워하면서도, 지킬을 사랑하는 엠마는 참아낸다. 자신이 가질 수 없음에 아파하면서도, 지킬을 사랑하는 루시는 견뎌낸다. 이성을 추구하는 선한 지킬은, 헌신적인 엠마와 정신적으로 교감한다. 욕망을 갈구하는 악한 하이드는, 매혹적인 루시를 육체적으로 유린한다. 지킬이 꽁꽁 감춰두었던 비윤리적인 욕구를 가감 없이 발산하는 하이드를 드러내기 위해, 엠마와 루시가 이용된다. 조건 없이 믿고 따르며 기다리는 엠마와, 무기력하게 체념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루시. 이들의 사랑은 악한 면을 숨기고 선한 가면을 쓰고 있는 지킬의 죄책감과 변명을 정당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피해 가지 못해 벗어나지 못해

오디컴퍼니 @od_musical


하이드는 포식자의 사냥처럼 강압적으로 루시를 집어삼킨다. 잔혹한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장면은, 총체적으로 낡고 도태된 극 안에서 가장 천박하고 혐오스럽다. 힘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모습이 집요하고 상세하게 그려진다. 거칠게 팔목을 휘어 잡힌 루시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고스란히 하이드의 폭력에 노출된다.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을 들추고 몸을 더듬는 손동작과, 강간과 다를 바 없이 강압적으로 행사하는 성적 행위는 참담할 정도로 역겹다. 뒤편에서 펼쳐지는 집단 난교로 정점을 찍으며,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이어야 할 넘버는 소름 끼치고 추악한 외설로 격하된다.



이제 가자 떠나자, Confrontation


/스포일러/ 일부분에 불과했던 하이드가 전부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 지킬은, 그를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약을 투여한다는 최후의 선택을 내린다. 루시에게도 편지를 보내 지금 당장 떠나라고 조언하지만, 이미 늦었다. 새로운 인생을 상상하며 루시가 떠나려던 찰나, 하이드가 찾아온다. 지킬을 사랑한 루시와 루시를 지키지 못한 지킬을 조롱하듯 여유롭게 노래를 흥얼대며, 하이드는 살인을 음미하듯 부드럽게 루시의 목을 긋는다. 잠시 숨어버린 하이드와 깨어난 지킬. 하이드가,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이, 제 두 손이 행한 끔찍한 결과물을 마주한다. 비명처럼 부인의 말을 쏟아내며, 지킬은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난다.


나는 나 너는 너 내가 너 너는 나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시작한 연구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굳건한 의지를 담아냈던 극의 첫 넘버를 다시 입에 올리는 지킬의 목소리가 망연한 절망에 잠긴 채 파들거린다. 길을 잃고 휘청이는 지킬과 다시 튀어나온 하이드는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한 사람의 육체에 공존하는 두 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동시에, 양립하지 못하는 의견 상충을 극적으로 엮어낸다. 휙휙 바뀌는 정체성에 따라 달라지는 조명과 반주는, 동작과 표정과 목소리로 지킬과 하이드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배우를 보조한다. 너는 그저 거울에 비친 허상이자 벗어날 악몽일 뿐이라며, 지킬이 저항한다. 너는 나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며, 하이드가 비웃는다. 격해지는 두 존재의 절규는 극단에 이른다. 영원히 그 안에 존재하리라는 하이드의 저주에 내몰린 지킬은, 미련 없이 떠나자며 자기 자신마저 내던지고 만다.


오디컴퍼니 @od_musical


지킬은 격렬한 싸움 끝에 하이드를 잠재우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지킬은 다음 삶을 준비하며 엠마와 결혼식을 올린다.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평온하게 진행되던 식은, 여태껏 잠잠했던 하이드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엉망이 된다. 이대로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리라 직감한 지킬은, 어터슨에게 죽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망설이는 그의 칼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지킬은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평안을 얻고 자유로워진다. /스포일러/



공연이라는 장르는 책처럼 글자로 존재하거나, 그림처럼 종이 위에 남아있거나, 음악처럼 음표로 존재하거나, 영화처럼 시대와 기술의 한계가 감안되는 영상으로 남아있는 2차원의 예술이 아니다. 극이 무대 위에 올라오는 바로 그 시점에 어떻게 관객과 교류하고 공감하고 공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긴 역사를 지닌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룸에 있어, 타 장르보다 훨씬 치열하고 심도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시대의 요구를 이해하고, 변화를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당장의 인기에 안주하는 게으른 예술은 필연적으로 도태된다. 그러므로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이 작품에게 요청한다. 극의 가치를 폄훼하지 말고 연출의 의무를 다해달라.




지킬앤하이드 (2018-2019)

지킬앤하이드 Jekyll and Hyde

†원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작곡: 프랭크 와일드혼

†한국제작: 오디컴퍼니

†한국공연: 2004(초연) ~ 2018-19(진행중)

†공연시간: 170분 (인터미션 20분)

†관람등급: 만 7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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