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1 육체의 길을 벗어나

D+13 | 드디어 만났다, 나의 로망

by 누비
시작. 부르고스(Burgos)
종료. 오르니요스(Hornillos Del Camino)
해냄. 5시간 반 / 20.67km



쉼이 길었다. 힘들고 고통스럽던 육체의 길을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길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물안개 가득한 부르고스에 작별을 고한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이 길을 반갑다고 느끼는 스스로를 인지하고 조금 웃었다. 이제야 '순례자'라는 명칭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표지판으로 가늠해보는 지도 위 나의 위치
뜬금없는 달팽이 군집


중간중간 유난히 누렇게 죽어버린 식물이 많길래 유심히 들여다봤더니, 달팽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더라. 늪지 같은 작은 강과 호수가 간간히 있는 길이었는데, 물 덕분에 달팽이가 더 잘 살아남은 듯했다. 초등학교 때 교실에서 팔뚝만 한 달팽이를 열심히 키워본 전력이 있는지라, 빼꼼히 고개를 내민 작은 생명체들이 밉기보단 반가웠다. 거시적인 시야를 좋아하는 아부지는 이렇게 작은 걸 어떻게 발견했냐며 놀란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다른 걸음을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날, 상상하던 산티아고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풍경을 마주했다!


샛노랗고 화려한 해바라기 밭
스페인 맞구나, 맞아!


시들어 까매진 해바라기만 만났던지라 기대를 버렸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 샛노란 빛깔이 시야 가득 담긴다. 벅찬 마음에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배경음 삼아 황급히 걷는다. 새파란 하늘과 샛노란 꽃잎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풍경에 넋을 잃고 핸드폰을 꺼내든다. 행복하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2주를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바라고 꿈꾸며 상상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바로 여기 있었어!


신난 얼굴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 옆으로, 꽤 많은 순례자들이 담담히 스쳐간다. 그림 같은 전경에 무던한 그 모습이 도리어 신기하다. 스페인, 드넓은 평야, 라만차의 기사, 해바라기, 돈키호테, 풍차. 곳곳에 묻어있는 이 로망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거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뒷모습


애써 정신줄을 부여잡고 다시 걸음을 옮기다가 또 다른 로망을 마주했다. 말을 타고 순찰을 도는 경찰이라니! 가까이서 보니 더 거대한 말의 위용과 자태에 새삼 감탄했다. 순찰 구역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 다음날 순례길 위에서도 이들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잘 관리받아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이 말들을 보니, 아스팔트뿐인 도시에서 마차를 끄는 말들이 떠올랐다. 도심지의 마차 관광 사업이 제발 금지되길 바란다.


홀로 서있는 저 나무가 포토 스팟이라고
눈에 보이는 목적지


해바라기 덕에 한층 밝아진 마음으로 계속 길을 걷는다. 완만한 경사로를 걷다 보니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시야에 걸린 목적지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차곡차곡 누적되던 피로가 몰아친다. 모래 많은 내리막길이 미끄러워 무릎과 발바닥에 통증이 쌓인다.


상징체인 닭이 자주 보인다


결국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마을에 당도한다. 늘 그랬듯이. 이메일로 예약한 알베르게에서 퇴짜를 맞는다. 방이 다 찼단다. 황당함을 삼키고 맞은편의 알베르게로 향한다. 체크인을 하고 공용 욕실에서 몸을 씻어내고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순례길의 루틴에 맞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도보 5분 거리의 길 하나가 전부인 작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점심은 바에서 빠에야를 먹었고, 저녁은 마을 끝에 위치한 Origen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안쪽에 놓인 드럼과 기타도 매력적이지만, 벽면 하나를 채우고 있는 한국어 시가 인상적이다.


현지 직송 와인


오늘의 메뉴가 있는 전형적인 로컬 음식점이다. 하우스와인 또한 현지 느낌 낭낭하다. 와인병의 라벨지에는 아주 간단한 정보와 바코드뿐이다. 이런 술을 언제 또 마셔보겠는가! 와인 한 모금에 고단한 하루가 녹아내린다. 이 위로가 내일의 원동력이 되리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 아 맞다 이거 여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