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노선은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이다. 그보다 조금 더 위에는 북쪽길(Camino del Norte)과 프리미티보길(Camino Primitivo) 등이 있다. 우리는 프랑스길을 걷되, 일정 상 가능하다면 길 북쪽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덕분에 우리의 까미노는 한층 풍성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인물만 대체 몇이야?!
부르고스 대성당의 내부가 아름답다는 후기를 읽고, 순례자 할인을 받아 입장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당 외부도 현란했지만, 내부는 한층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레콩키스타에 앞장선 스페인의 국민영웅 엘 시드가 묻힌 성당이기도 하다.
화려한 예배당과 스테인드글라스
빛 들어오는 돔 천장 사랑함! 심지어 별모양!
나무줄기로 표현한 계보가 예뻐서
어플을 받아서 오디오 가이드도 들을 수 있지만 한국어는 지원 안 됨. 온갖 조각과 부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특히 안쪽 중정에서 바라본 뾰족뾰족 성당 첨탑들이 아름다웠다. 까미노 길 위에서 유일하게 내부를 방문한 대성당이고, 무척 만족스러웠다.
부르고스 대성당 중정
햇빛에 반사된 스테인드글라스 빛깔을 사랑함
부르고스 전망대(Mirador Del Castillo)도 올라갔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부르고스 전체와 도시 외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탁 트인 전경
인생샷 뷰포인트
ALSA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에서 빌바오로 이동했다. 스페인 곳곳을 연결하는 이 회사의 버스를 까미노 중간중간 애용했다. 가파른 바위 산맥을 통과하여 도착한 빌바오는 지금까지 만난 여타 마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곧게 뻗은 도로들을 중심으로 정연하게 정돈된 크고 젊은 도시랄까.
구겐하임 미술관
거대 거미 "Maman"
거대 댕댕이 "Puppy"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을 이렇게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독특한 외관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의 변화에 따라 인상이 휙휙 달라졌다. 다양한 컨셉의 전시를 관람하던 중,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강변을 따라 쭉 걷다 보니 구시가지 쪽에 맥주 등을 파는 부스들이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그대로 지나쳐 Erribera merkatua 시장에서 타파스와 샹그리아를 먹었다. 한 시간 남짓 지난 뒤 다시 거리로 나오자,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다.
락밴드의 라이브 음악이 쏟아지던 무대
이날은 바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인 빌바오에서 매년 열리는 Semana Grande 축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거리에는 음악과 춤이 가득했다.
힘차게 나부끼는 바스크 지역 깃발
스페인이라는 하나의 국가 안에 포함된 여러 지역들은 저마다 완연히 다른 특색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워낙 유명하고, 그 외의 지역 또한 각자의 역사와 문화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지역 축제인데, 운 좋게도 우리는 까미노를 걸으며 그러한 행사를 꽤 자주 마주쳤다. 그 덕에 스페인 북부 지방의 지역색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비로소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빌바오 네르비온 강(Nervion River)
구시가지 곳곳에 위치한 무대에서는 저마다의 공연이 이어졌다. 특히 중심지인 Nueva 광장의 무대에서는 전통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운데 세워 놓은 기둥에 끈을 묶었다 푸르는 전통춤을 추며 흥겨움을 더해갔다. 해가 비치는 하늘에서 비가 스콜처럼 쏟아지는 날씨만 아니었더라면 일몰 후 불꽃놀이까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심지어 이날은 빌바오 스타디움에서 빌바오 축구팀 경기까지 있어서 도시 전체가 들썩였다. 초반에 지고 있다가 마지막에 극적으로 역전승했다는 경기 결과를 다음날 아침에 접했다. 빌바오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밤이었으리라.
Sopela Hondartza
영드 <브로드처치>가 떠오르는 가파른 절벽과 바다
다음날 아침에는 지하철을 타고 외곽으로 이동해서 지중해 해변을 보고 왔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움푹 들어간 만의 형태여서 바람도 많고 서퍼도 많았다. 거센 바람에 잔뜩 지쳐 부르고스로 돌아왔다.
불과 며칠 만에 차가워진 공기는 길을 걷는 이들의 의상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반팔과 바람막이와 패딩이 공존하는 길거리라니! 이것이 정녕 8월 말의 스페인이 맞단 말인가!
빌바오의 거리
덧. 빌바오에서 얻은 따수운 추억 하나. 바닷가에 가기 위해 지하철 역사 내 기계에서 티켓을 구매하려는데 잔돈이 없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뭐라도 사서 큰 지폐를 깨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한 커플이 먼저 다가와서 목적지를 묻고 결제창으로 가더니, 상황을 이해하고는 말릴 겨를도 없이 쿨하게 5유로 지폐를 넣어줬다. 게다가 좋은 여행 되라며 "고맙습니다!"라고 한국어까지 연발했다.
인류애 넘치는 다정함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작은 호의 하나로 도시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이 차오른다. 서울에서 난감해하는 여행객이 있다면 반드시 그냥 지나치지 않으리란 다짐까지 해본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여행자의 기분이란 어찌나 달콤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