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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 길의 매력은 고요함일까

D+14 | 한국인이 사랑하는 까미노

by 누비
시작. 오르니요스(Hornillos Del Camino)
종료.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해냄. 5시간 / 19.11km



풀배낭을 메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의 목표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는 카스트로헤리스. 저녁은 오랜만에 한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일과가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덕도 있으리라. 오늘의 나에게 할당된 길만 뚜벅뚜벅 걸어내면 되는 규칙적인 하루하루. 복잡한 현실의 번뇌에서 빗겨 난 마음은 점차 고요와 평안을 향해 가라앉는다.


그림 같은 하늘
잡힐 듯 낮은 구름이 신기해서, 손가락으로 쿡


이날 하늘 위 구름이 너무나도 낮게 떠 있어서 걷는 내내 자꾸 위를 올려다보게 된다. 닿을 것 같은 거리감에 괜히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보기도 한다. 유럽 하늘 특유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이 모든 찰나들이 더없이 행복하다. 수채화에 담겨있던 온갖 하늘이 머리 위에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현실이 짜릿하다.


출발 시간도 다르고 걸음 속도도 다르기에, 의외로 길 위에서 순례자를 마주치는 빈도가 많지 않다. 걸으면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확신하기 어렵고. 그래서인지 만남마다 온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게 된다. 부엔 까미노! 그대가 걷는 오늘의 이 길도 평안하고 소중하기를.


삼볼(Sambol) 마을 표지판
온타나스(Hontanas) 마을 입구


삼볼(Sambol)이라는 마을을 지나쳐 온타나스(Hontanas)에 도착한다. 삼볼에는 오두막으로 된 알베르게가 딱 하나 있다고 하고, 온타나스에는 스파가 있는 세련된 숙소가 있더라. 마을마다 특색과 분위기에 차별점이 있다는 것도 이 길을 한층 다채롭게 만든다. 어디에서 묵느냐에 따라 까미노의 추억이 천차만별로 다를 테니.


온타나스의 성당
성당 앞에 서있는 눈사람 순례자
온타나스 골목의 댕댕이들


입구에서 맛있는 오렌지주스와 크로와상을 먹은 뒤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구석 곳곳에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요소들이 많은 온타나스에서 묵었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룻밤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은 곳은 딱 여기뿐이었다. 나풀대던 다양한 국기들 중에 태극기도 있었고.


고즈넉한 길 옆에 남겨진 건물의 잔해


육체의 길을 넘어섰기 때문인지 혹은 뿌듯한 기분 탓인지, 걸음에 여유가 깃든 것 같다. 물론 19km라는 짧지 않은 거리를 단숨에 걸어내다 보니 갈수록 발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왼편으로 졸졸 흐르는 강줄기의 물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땅을 소유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던 초창기 미국의 개척자들을 다룬 옛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요한 흔적만이 남은 길이, 애틋하다.


부르고스 전후부터 길 위에서 한국인 용띠 커플을 자주 만났다. 유럽여행 일정 한가운데에 까미노를 넣었다는 그들의 걸음이 워낙 경쾌하고 빨라서 발걸음을 나란히 한 적은 없다. 다만 이날 알베르게에서 방을 같이 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커플 중 한 사람은 몇 년 전 까미노 경험이 이미 있었는데, 다른 한 사람이 걸어보고 싶다고 하여 다시 이 길을 찾았다고 했다. 요령을 피우지 않고 풀배낭을 멘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다정하고 씩씩하여 멋있었다. 이분들과 연락처나 SNS를 공유하지 않아 아쉽다.


산 안톤(San Anton) 수도원


수도원의 흔적만 남은 산 안톤에서 머뭇대지 않는다. 자재를 싣고 있는 트럭 운전사가 밝게 인사를 건네준다. 목적지가 머지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본다. 내리 흙길을 걸어온 발바닥이 딱딱한 아스팔트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무념무상으로 움직이는 다리도 비명을 내지른다. 미안하다. 내가 주인이긴 한데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단다. 조금만 참아봐라.


카스트로헤리츠(Castrojeriz)


드디어 목적지가 시야에 잡힌다. 눈에 들어온다고 도착한 건 아니지만. 쭉 뻗은 직선의 차도를 따라 걷는다. 잡힐 듯 말 듯 천천히 가까워지던 마을 입구에 도달한다. 표지판 하나가 이토록 반가울 일인가. 태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예약해 둔 알베르게 앞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용띠 커플이 쉬고 있다. 양말부터 벗어던지고 주저앉는다. 정오에 가까운 한낮의 마을은 그저 적막하기만 하다.


알베르게 주인의 친절한 안내에 맞춰 체크인을 한다. 프런트 뒤쪽에 적힌 한국어와 다채로운 한국 제품들의 자태에 눈이 팽팽 돌아간다. 샤워를 하고 짐을 푼 뒤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서본다. 그런데 이 마을은 왜 구석구석 공사 중인가. 구글맵에 나온 레스토랑은 하나같이 문을 닫았거나 오픈 시간이 지나치게 늦다. 결국 광장의 바에서 시원한 맥주와 토르티야로 허기만 달랜다.


그리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라면을 끓어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무얼 위해 그 고생을 했던 것인가! 물론 그 덕분에 한층 맛깔나진 라면을 먹긴 했지만. 힘들고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건강한 정신력은 차근차근 강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녁은 비빔밥


체크인할 때 요청한 저녁식사를 먹으러 내려온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한식에 눈물을 찔끔 흘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나물이 없어서 한국의 비빔밥 맛은 나지 않지만, 고추장과 참기름만으로도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곁들여 제공되는 무제한 와인이 맛있어서 식사 자리가 한층 부드럽다. 의외로 한국인은 넷 뿐이다. 비건 등 저마다의 기호에 맞게 제공된 한 그릇을 맛있게들 비운다.


저녁 7시가 훌쩍 넘었으나 해가 저물질 않는다. 부른 배를 꺼뜨릴 겸,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부지가 발견한 일몰 포인트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한참을 서있는다. 고단한 하루가 천천히 저문다. 매일같이 잠자리가 바뀌는 유랑의 일상을 해내고 있는 스스로가 새삼스레 대견하다. 포기하지 않은 덕에 새로운 아침과 새로운 저녁을 마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조금씩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한다.


카스트로헤리츠 입구 쪽의 성당


성당 앞쪽에 알베르게가 하나 더 있다. 1층 카페에 들어가 친절한 직원에게 커피를 주무한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카푸치노가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다.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교수님 그룹도 옆 테이블에 앉는다. 감춰지지 않는 행복감을 얼굴 가득 담고 있는 우리 부녀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한다. 덕분에 잊을 수 없던 저녁을 기념할 사진이 남았다. 노을빛으로 밝게 물들었던 성당이 점차 어두워진다. 뿌듯한 가슴을 한껏 끌어안으며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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