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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누가 익숙함을 입에 올렸던가

D+15 | 예기치 못하게 갱신된 최악의 길

by 누비
시작.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종료.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on de Campos)
해냄. 9시간 / 29.9km



카스트로헤리스를 떠나 프로미스타(Fromista)에 당도하는 것이 보통의 하루 코스다. 하지만 우리는 딱 한 마을만 더 가기로 했다. 프로미스타에 마땅한 알베르게가 남아있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이날의 초반 길이 오르막이라서 배낭을 먼저 보내는 동키 서비스를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왕 빈 몸으로 걷는 것, 몇 킬로 정도 더 걷는 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 선택으로 순례길 최악의 길이 갱신되고 만다.


태양처럼 밝은 달을 좇아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 어둑한 새벽에 가벼운 몸으로 알베르게를 나선다. 손전등 빛에 의지하며 힘차게 걸음을 옮긴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 어둠에 눈이 익는다. 동에서 서로 향하는 길이기에, 달을 쫓아 나아가는 새벽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볍게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등 뒤의 하늘이 점차 밝아진다. 곧 태양이 떠오르리란 직감이 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길 위의 순례자들이 하나 둘 속도를 늦춘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순간을 시야에 한가득 담기 위하여.


등 뒤에는 떠오르는 태양
눈 앞에는 저물어가는 달


머나먼 타지에서도 해돋이는 벅차게 아름답다. 세상 구석구석에 찬란한 빛과 따뜻한 온기를 건네는 이 뜨거운 항성과의 재회가 반갑고 고맙다. 당연했던 모든 것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만드는 길의 매력에 조금씩 마음이 열린다.


언젠가 이 찰나가 무척 그립고 간절하리라.


쌀쌀하고 서늘한 새벽 공기, 순례자들 간의 낮은 대화 소리, 물기를 머금은 대기의 고요한 묵직함. 그리고 이 모든 잔잔한 파동을 삽시간에 생동감 있게 바꿔버리는 온전한 태양의 시간.


막 떠오른 태양으로 길어진 그림자
이제 절반 왔다!


일출 후의 세상은 빠르게 밝고 뜨거워진다. 샛노란 해바라기 밭을 좌우에 두고 차근차근 발을 옮긴다. 늦봄~초여름에 왔더라면 사뭇 달랐을 풍경에 옅은 아쉬움이 남는다. 쓸쓸함과 황량함이 묻어나는 사위는, 버킷리스트에 담으며 상상했던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확실히 다르다.


순례길이 통과하는 도시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생장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데, 나 역시 이 길을 걸었다.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스페인에서 끝나는 프랑스길은, 까스띠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에 속한 도시가 많다. 걷다가 만난 훼손된 순례길 표지판은 추후 포스팅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잊을 수 없는 운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에서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덥다. 발이 아프다. 지친다. 그늘 아래에 드러눕고 싶다. 이 길을 걷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 슬금슬금 고개를 다시 내민다. 찰과 사유 대신 한숨과 고통만이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울면서 걸었던 수비리의 내리막길이 떠오른다. 악몽의 재림이다. 걷기 힘든 길의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있는 발바닥이 작작 괴롭히라고 비명을 질러댄다. 고여있는 운하에서 쿰쿰한 물비린내가 풍긴다. 눈물이 찔끔 난다. 끝이 보이질 않는다.


운하의 끝이자 마을의 입구


드디어, 마침내, 운하의 끝이 보인다. 괴로워서 기뻐할 정신도 없다. 바로 옆의 인포 센터에서 쎄요를 찍어야 하는데, 그 몇 걸음조차 낭비하고 싶지 않다. 아부지에게 순례길 여권을 건네고 잠시 숨을 고른다. 뜨거운 태양 때문에 계속 짜증스럽다. 일출에 감탄하던 몇 시간 전의 나는, 이미 없다.


내게 생명수를 줘~ 이 잔 가득 채워줘~


운하의 끝에서 프로미스타 중심가까지의 포장도로 역시 괴롭기만 하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을 정도로. 구글맵에서 평점이 높은 순례자 식당은 기재된 시간에 오픈을 하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바로 옆의 호텔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는다. 시원한 맥주와 짭짤한 올리브의 조화에 고통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린다.


순례길에 익숙해졌노라는 오만이 자초한 몇 킬로가 아직 남아있다. 단 한 걸음도 더 옮기지 못할 것만 같던 발은, 선선한 그늘 아래의 짧은 휴식을 통해 노여움을 푼다. 배낭의 도착지는 바꿀 수 없다. 이미 던져버린 주사위의 눈을 노려보며, 신발끈을 고쳐 맨다.


차량용 표지판은 행인에게도 도움이 된다


야외 마구간과 탁 트인 광장이 있는 프로미스타를 등지고, 최종 목적지인 포블라시온을 향해 걷는다. 그늘 한 점 찾을 수 없는 탁 트인 길은 고속도로 바로 옆에 곧게 뻗어있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늦여름 한낮에 움직이는 미련한 이들은 많지 않다. 스페인에 씨에스타가 있는, 아니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하루만 겪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혹은 든든하게 채운 배 덕분인가. 각오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포블라시온에 도착했다. 프로미스타보다 훨씬 작은 마을로, 예약해 둔 숙소를 금방 찾는다. 체크인을 끝내기도 전에 건네받은 웰컴 드링크 와인 한 잔에 행복감이 차오른다.

배낭은 우리보다 늦었다. 배신감이 든다.


저녁은 빠에야
스페인 후식주


어제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오늘 저녁식사는 마을을 헤매지 않고 숙소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해산물 가득한 빠에야와 하우스 와인이 하루의 노곤함을 위로한다. 심지어 예상치 못한 후식주까지 받아서 기쁨이 더해진다. 12년 전 스페인 여행에서 먹어본 독한 후식주가,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함 때문에 늘 그리웠다. 현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사소한 디테일이 바로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다.


매력적인 중정


아기자기하고 다양하게 꾸며진 중정이 무척 매력적인 숙소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미니어처 건물은 구석구석 섬세하게 꾸며져 있고, 벽면 이곳저곳에는 그림이 여럿 걸려 있다. 하나의 작은 전시관 같은 정원을 천천히 산책하며 잔잔한 여유를 만끽한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마주하는 한갓진 찰나.


여유의 정점, 선베드


유난히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하루였기에, 목표를 달성한 뒤 만끽하는 휴식이 이토록 달콤한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존재하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맞춰 채워가는 하루들.

최악의 길을 갱신했기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쉼. 덕분에 얻은 깨달음이 있지만, 그래도 다시는 이런 무리를 자행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2023년 8월의 마지막날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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