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on de Campos) 종료.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 해냄. 4시간 / 15.62km
어제 더 걸은 만큼 오늘 덜 걷는다. 어째 조삼모사 같이 들리나, 어제는 배낭이 없었고 오늘은 배낭이 있으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노라 자위해 본다.
판타지 영화 스틸컷 같지 않은가!
음력 1일부터 시작된 여행길 위에서 차츰 동그랗게 차오르는 달과 매일같이 조우했다. 동그란 만월의 단계를 지나 점차 작아지는 달을 마주하며 걸어갈 내일들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푸르게 색을 입은 하늘 위에 덩그러니 남아 존재감을 내뿜는 새하얀 달이, 몽환적으로 아름답다.
비스듬하게 평행선을 그린 비행운 사이에 걸린 달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 같기도 하다.
벌써 목적지 이름이 보인다!
오붓한 부녀 코스프레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쏟아지는 친숙한 멜로디가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응원한다. 인간이 정체성을 구축하는 시기라는 십 대 시절부터 들어온 아이돌의 음악. 영원이란 말이 존재하리라 굳게 믿었으나, 1n년 만에 끝내 탈덕을 선언하게 만든 이들. 한참을 듣지 못했던 그들의 음악을 자연스레 흥얼거리며, 그 노래들로 위로와 힘을 얻었던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듬는다.
오빠들이 잘못한 거지, 오빠들을 좋아한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알았어! 길 안 잃어버릴게!
친절한 마을 지도와 특이한 벽화
마을 곳곳에 있는 조개껍질
정오가 되기도 전에 목적지인 카리온에 도착한다. 아직 체크인이 불가한 시간이기에, 근처 카페에서 기다림을 가진다. 커다란 잔의 맥주를 들이키며 고단한 발에 휴식을 준다. 낮술 최고. 이 마을은 순례자를 대상으로 한 가게와 숙소가 많아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한 방에 이층 침대가 빼곡하고 공용샤워실 및 화장실의 숫자도 적은 공립 알베르게는 최대한 지양하고 싶었는데, 아부지가 여기를 고집하셨다. 순례자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기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수도원 공립 알베르게. 체크인을 할 때 자원봉사자들이 여러 규칙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시간, 기도를 행하는 시간 등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스페인 국기
숙소에 대한 후기는, 없다. 이 알베르게에 묵은 소기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비리에서 연을 맺은 한국인 한 분을 이 마을에서 다시 만나 점심과 저녁까지 함께 하느라 알베르게 행사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많은 만남을 가지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은 뜻대로 되질 않는다.
물론 소규모 모임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충만한 기억을 쌓았다. 일단 성당 앞의 북적이는 식당에 들어가 거한 점심을 먹었다. 와인이 미지근하여 잔에 넣어 먹을 얼음을 부탁했는데, 얼음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양동이를 가져온 직원이 와인 병을 파묻더라. 무엇이든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워야 직성이 풀리는 건 한국인의 고유 특성일지도.
살살 녹는 연어스테이크
잠시 쉬다 나와서는 강가의 공원에 피크닉을 갔다. 물놀이를 하는 현지인들의 소리를 배경음 삼아 시원한 수박을 잘라먹고 샐러드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여름휴가가 따로 없더라. 탁 트인 공원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선선해지는 공기를 느낀다.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나라의 여름을 한껏 만끽한다.
쌓아온 것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순례길을 걷는 60대의 한국인을 많이 만났다. 인생의 전환점으로 이 길을 택한 이들의 얼굴은, 피곤함을 넘어서는 성취감으로 뜨겁게 반짝인다. 30대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관점과 감정이 신선하다.만약 30년 후에 이 길을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