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 굴곡이 있었기에 가능한 평안

D+17 | 끝이 보이지 않는 메세타 대평원

by 누비
시작.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
종료.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
해냄. 4시간 / 16.98km


2023-09-02.png


이른 새벽부터 야무지게 배낭을 챙겨 알베르게의 부엌으로 내려온다. 이미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도 있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있는 순례자들도 있다. 그 안에 섞여 들어 한국에서 챙겨간 라면스프를 넣은 현지 컵라면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고요하게 분주하던 알베르게에서 풍기던 새로운 날의 설렘이, 문득 그립다.


마을 이름이 적힌 조개껍데기
첨탑 끝에 아슬하게 걸린 밝은 달


익숙하게 신발끈을 꽉 동여매고 밤의 어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리로 나선다. 전날 마을을 누비고 다닌 아부지의 뒤만 쫓아가다가 길을 잘못 들 뻔했다. Gronze 어플 지도와 GPS가 없었다면 순례길이 한층 고단했으리라. 가로등이 끊긴 길 한가운데에서 마을의 끝에 도달했음을 가늠한다. 사위가 분간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 빛에 기대어 걸음을 계속 옮긴다.


태양처럼 밝은 달을 바라보며
푸른 하늘 속 창백한 달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곧은 평지. 전후좌우 둘러봐도 특별함이 없는 쓸하고 한적한 거리. 자잘한 크기의 돌과 모래가 섞인, 걷기 힘들지 않은 바닥. 뒤에서 달려오는 자전거 순례자만 신경 쓰면 되는 도보 전용 도로. 오로지 걷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담백한 길.


귀에 꽂은 무선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템포 빠른 음악에 맞춰 속도를 높여본다. 똑같은 풍경으로 인한 지루함 대신 목표를 향해 끊김 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경쾌함이 전신을 휘감는다. 시야에 담기는 하늘과 나무와 구름과 풀들이 시시각각 달라짐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한 걸음 전과 한 걸음 후가 동일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매 찰나가 귀해진다.


꿀맛 같은 커피향 휴식


갑작스러울 정도로 우두커니 길 한가운데 서있는 카페 트럭 앞에서, 순례자들은 기꺼이 발을 세운다. 동전을 세어 아메리카노 3잔을 주문하니 샷잔에 채운 주스를 서비스로 내어준다. 진한 커피 향에 마음이 녹진해진다. 이 오아시스를 그냥 지나치는 의지 강한 순례자들에게 "부엔 까미노" 인사를 건네며, 편안하고 달콤한 휴식을 누린다.


낮에 뜬 달
낮에 뜬 달
낮에 뜬 달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덩그러니 떠있는 새하얀 달. 해가 떴음에도 선연하게 존재감을 뽐내는 창백한 빛깔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현실감이 없다. 굴곡 없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땅, 바람 따라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하늘. 그 둘이 맞닿은 저 멀리의 지평선은 그저 아득하다. 이 침착한 고요야말로 까미노의 정체성 그 자체가 아닐까.


오늘도 쿡 찔러본다, 낮게 뜬 구름


생장에서 부르고스까지 육체의 길, 부르고스에서 라바날까지 마음의 길이라 불린다. 배낭이 가장 무거울 수밖에 없는 여행의 시작이 제일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이라니. 걸음을 떼는 순례자에게 피레네 산맥부터 넘어보라는 요구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려면 필히 고개 하나를 넘어야만 하는 변곡 가득한 육체의 길 위에서, 나 자신의 한계점을 자주도 맞닥뜨렸다.


지긋지긋한 육체의 길을 벗어나 비교적 평탄한 마음의 길을 며칠 걷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무거운 걸음으로 고단하게 넘어온 육체의 길이 있었기에, 지겨울 정도로 뻗어있는 정적인 마음의 길을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극한까지 내몰렸던 육체가 천천히 회복되며 마음을 들여다볼 여력을 내기에 이르렀다. 오늘의 평안과 여유가 까미노 동선에 담긴 고도의 전략이었다니!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끝없이 나아가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길을 걷던 아부지를 제대로 렌즈에 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단조로운 색감의 메세타 평원을 가로지르는 순례자의 뒷모습.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피사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라니,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가. 숨 쉬듯 당연한 오늘의 일상이 훗날 지독히도 그리울 것을 잘 알기에, 눈과 마음과 카메라에 이 찰나를 담는다.


칼자딜라 도착!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마을과 마을 사이 17km 내내 이토록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니, 놀라워라.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커다란 맥주를 한 잔씩 주문해 들이킨다. 전날 카리온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걸어온 아부지의 친구분은 얼음 넣은 콜라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신 뒤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순례자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한다. 아쉽게도 산티아고에 도달하는 그날까지, 재회는 없었다.


무조건 외쳐본다, Uno Vino Tinto!
고생 끝의 단백질 보충


루틴대로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샤워를 한다. 점심을 먹어볼까 하는데, 정말 작은 마을이라서 선택지가 거의 없다. 알베르게 뒤편 레스토랑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해결한다. 엄청나게 활발하고 친절한 웨이터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열렬한 리액션을 보여준다. 낯선 이에게 기꺼이 베푸는 다정함이 기껍다. 아부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방명록도 남기고 왔다.


레스토랑 앞 전경


진짜, 아무것도 없다. 다른 계절에 왔더라면 조금쯤 다채로운 색감의 풍경이었을 터다. 하지만 두 발로 직접 걸어낸 길이기에, 다소 황량하고 쓸쓸한 이 모습이 한층 익숙하고 애틋하다. 2층에 위치한 알베르게의 화장실 창문 너머로는 오늘 걸어온 평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세면대 앞에 한참을 서있다 보니 마음속 감정들이 천천히 흘러나간다.


카스트로헤리스에서 찬 행복을, 포블라시온에서 탁 트인 해방감을, 카리온에서 일상적인 여유를 경험한 뒤 도달한 칼자딜라.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까미노를 편견 없이 온전하게 마주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4 과거와 미래를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