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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재미없는 길도 인생의 일부

D+18 | 나의 특별함은 누군가의 일상임을

by 누비
시작.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
종료. 사하군(Sahagún)
해냄. 5시간 / 22.25km



하루의 걸음을 시작하기 전 아침식사 여부는 보통 처음 당도하는 마을까지의 거리에 따라 결정했다. 다만, 가끔 카페가 없거나 휴무인 불상사로 인해 그다음 마을까지 쫄쫄 굶는 사태가 몇 차례 있었다. 특히 주말이 겹치면 불행의 가능성이 높았다. 지난날의 실패를 거름 삼아, 일요일인 이날은 알베르게 조식을 체크인 때 미리 신청해 두었다. 여행 자체가 일상이 되니, 자그마한 요령과 루틴이 만들어진다.


꾸물거리는 하늘 아래 순례길


어슴푸레한 새벽에 길을 떠났지만, 이내 사위가 밝아진다. 꾸물거리는 하늘 때문에 지는 달도 뜨는 해도 보이지 않지만, 아침이 왔다. 차도 바로 옆의 길을 걸어야 해서 다소 지루하고 심심하다. 귓가에 나만의 콘서트장을 재오픈하고 씩씩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본다. 체력이 있을 때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두어 시간 후의 내가 덜 힘들기 위해서.


어제보다 더 지루한 길
9월의 순례길이 이토록 쓸쓸할 줄이야


머리 위로는 하늘을 메운 구름의 묽고 흐린 회색이 가득하고, 전후좌우로는 추수가 끝나 밑동만 남은 밀밭의 황토색만 남아있다. 아직 여름의 흔적이 가득한 9월 초순인데도, 순례길의 어떤 구간에는 단조로운 빛깔만 존재한다는 점이 새로웠다. 항상 볼거리가 많은 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걷는 와중에 관찰하고 느끼며 고민할만한 요소가 없으니, 생각은 자연스레 몽상으로 넘어간다. 전날 꿈에서 경험한 생생한 상상에 살을 붙여나간다. 가능성 없는 우연과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들을 엮어가며 있을 수 없는 인생을 그려본다. 울고 웃으며 치열하게 살아낸 삶의 끝자락까지 도달한 망상을 마치니, 벌써 3시간이나 걸었다.


카페 앞의 다육이 화분과 바람개비
목적지까지 388km


첫 번째로 만난 마을은 그냥 지나쳤지만, 두 번째로 만난 마을 모라티노스(Moratinos)에서는 잠시 발을 세웠다. 거센 바람에 쌀쌀하기까지 한 날씨 때문인지, 이미 카페는 순례자들로 가득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에 익은 얼굴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쥔다.


스쳐가는 순례자들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이 길이, 이곳에서 살아가는 현지인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오늘 맞이한 손님의 얼굴을 내일은, 혹은 앞으로 영영 볼 수 없다는 것. 찰나에 머물다 떠나는 바람 같은 여행객들을 향한 다정한 친절이 새삼 따뜻하고 고맙다.


끝없이
이어지는
헛헛한 길


이다지도 재미없고 지루한 길이라니! 쓸쓸함이 뚝뚝 묻어나는 풍경에 흥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핸드폰을 복대에 넣어버리고 다시 상념에 젖어든 나와 다르게, 아부지는 지치지 않고 계속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대체 뭘 그렇게 찍느냐 여쭤볼 때마다, 행복이 가득한 미소와 함께 그냥 다 너무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푸르른 밀밭이 넘실대는 순례길을 보여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가까이 보이는 목적지


슬슬 목적지인 사하군(Sahagún)이 보인다. 물론 시야에 들어왔다고 해서 정말로 다 온 건 아니다. 자동차로 움직인다면 쭉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을, 두 다리의 순례자는 도보 전용 샛길로 우회해야 한다.


굳게 닫혀 있는 작은 성당
사찰의 천왕문 같은 걸까


이내 우회로의 의도를 알아챈다. 이 성당을 보고 사하군으로 들어오라는 거다. 성당 앞의 공터에는 짐을 늘어놓고 지친 발을 달래고 있는 순례자들이 있다. 우리는 슬슬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계속 걷기로 한다. 성당 옆에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듯한 석상이 있어서 사진을 찍어본다. 프랑스에서 온 중년 부부의 부탁에 사진을 찍어도 준다.


벌써 낙엽이 지는 건가요
우비로 꽁꽁 싸맨 배낭


이내 굵어진 빗줄기에 우비를 꺼내 배낭을 감싼다. 우리가 사용한 배낭은 오스프리(Osprey)라는 브랜드로, 수납공간도 많고 튼튼해서 여행 내내 잘 사용했다. 까친연 네이버 카페글의 조언을 따라, 종로 5가의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매본 다음에 구매했다. 등산화도 여기서 신어 보고 구매했고. 앞선 이들의 경험 덕에 시행착오가 많이 줄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드디어 도착이다. 오락가락하는 비로 인해 막판에 피로도가 치솟았다. 서둘러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마카로니와 라자냐가 아주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흡입하느라 사진은 없다. 맥주는 당연히 커다란 잔으로 들이켠다. 이 맛에 오늘도 걸었지.


Bar에 담배 자판기가 있는 건 익숙해졌으나, 도박 기계가 있는 건 여전히 새롭다. 자연스럽게 가게에 들어와서 기계를 열고 동전을 한 아름 쓸어 담는 관리자의 모습은 더욱 생경했고. 다트판이 있는 한국의 술집과는 사뭇 다른 문화가 새삼스럽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전날 온라인으로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드러누워 본다. 가득 잡혔던 물집이 터지고 아물어 한차례 가라앉았던 발바닥에 새로운 물집이 잡혀있다. 너무 씩씩하게 걸었나 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보통 발톱이 빠진다는데, 나와 아부지는 발가락과 발바닥에 물집만 잡혔다.


사람마다 걸음걸이가 다르니 상처도 다르다. 마치 각기 다른 신체와 정신력으로 살아내는 인생에서 경험하고 마주하는 아픔의 질감이 전부 다르듯이.


저녁은 언제나 와인


배가 고파 6시쯤 숙소를 나선다. 역시나 스페인. 대부분의 식당이 여전히 브레이크 타임이다. 비가 오는 우중충하고 추운 날에도 저녁을 늦게 먹다니. 현지인들의 시간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인 걸까.


나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동네를 헤매다가 결국 호텔 바로 옆의 카페에 들어간다. 생각보다 맛있는 요리와 언제나 평타 이상인 현지 와인 덕에 기분이 나아진다. 콤한 현지식 디저트까지 먹고 내일을 위한 슈퍼마켓 방문까지 하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길에도 늘 끝은 있다. 과정이 어떠했든, 오늘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만 하면 많은 감정이 씻겨간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와 목적은 아직도 막연하지만, 쌓아가는 하루하루는 갈수록 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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