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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샛길로 빠져보는 것도 인생

D+19~20 | 스페인의 북부를 향하여

by 누비
출발. 사하군(Sahagún)
경유. 레온(León)
도착. 오비에도(Oviedo)


며칠 열심히 걸었으니 이제 쉼을 부여할 시간이다. 내리 계속될 평지가 재미없을 것 같은 데다가, 차도 옆을 걷는 길이 많아서 과감하게 패스하기로 한다. 사하군에서 레온(León)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 후 레온에서 1박. 레온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스페인 북부 오비에도(Oviedo)로 가서 1박. 거기까지 올라간 김에 근처의 코바동가(Covadonga)도 가보기로 한다. 스포 하자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안녕, 사하군


근처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다. 전날 미리 봐둔 ALSA 버스 스케줄에 맞춰서 기차역 주차장의 버스역으로 향한다. 예정된 시간이 되었음에도 감감무소식이라 조금 불안해진다. 하지만 정시를 지키지 않는 차가 어디 한둘이었는가. 다른 이들과 함께 20분가량 더 기다려보니, 버스가 도착한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대중교통인지라 현지인들이 꽤 많다.


1시간 남짓을 달려 레온에 당도한다. 내일 이용할 버스표를 미리 구매하려는데, 공사 중인 역사는 굳게 닫혀있다. 두 개뿐인 무인 기계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다. 몇 번 사용해 본 기계로 익숙하게 구매를 마친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정오라니.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체력이 뚝뚝 떨어진다.


산토 도밍고 광장(Plaza de Santo Domingo)


대도시답게 번화한 거리를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는다. 바닥난 체력을 해소하고자 대형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신다. 숙소의 체크인 시간을 앞당긴다. 자리를 털고 나오니 아까의 비는 거짓말이라는 듯 새파란 하늘이 반짝인다. 여기가 스페인인가요, 영국인가요.


보티네스 저택(Museo Casa Botines Gaudí)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가우디를 만나다니! 바르셀로나 여행 당시 가우디의 작품들 덕분에 무척 행복했었다. 아직도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인 그의 작품을 레온에서 만날 수 있어 더없이 기뻤다. (바르셀로나 여행기는 여기)


La Casa Del Dragon
가우디의 작품이 어디에 있을까


박물관보다 길거리가 더 흥미진진하다는 아부지와 잠시 헤어진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건물 자체가 가우디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해설도 만날 수 있다. 모든 글이 스페인어와 영어로 제공되며, 사진과 그래픽 또한 이해를 돕는다. 건물이 지어진 배경과 변화의 역사, 내외관의 디테일을 알 수 있어 무척 유용하다.


레온 전경을 담아내는 시원한 창문
건물 모서리의 둥근 방


바르셀로나의 까사 밀라나 까사 바뜨요와는 사뭇 다르다. 중세풍에 신고딕 양식을 끼얹은 외관에서 곡선보다 직선이 먼저 느껴진다. 하지만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가우디답게 자연에서 비롯된 곡선이 가득함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지붕의 재료 또한 여타의 건물들과 다르다. 위에서 내려다본 건물의 형태도 반듯한 직사각형이 아닌, 별자리 모양에서 따온 사각형이다!


특이한 질감을 살려낸 엽서 기념품
가우디의 옆에 앉을 수 있는 벤치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도시다. 사업가의 별장이자 사무실로 만들어져서 지역 은행 본사가 되기까지의 건물 내력은 도시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건물 하나를 들여다보니 도시 전체의 역사가 보인다. 도시는 그 안에 살았던,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담아야 한다.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
레온 대성당


보티네스 저택을 등지고 왼편으로 조금만 걸으면 거대한 레온 대성당이 시야에 한가득 담긴다. 나는 부르고스 대성당의 다채로운 화려함이 더 취향이었는데, 아부지는 레온 대성당의 단아한 웅장함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번잡스러운 느낌의 여타 대성당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레온 대성당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만면 가득 행복을 그려낸다. 우리는 이렇게나 닮은 듯 다르다.


유럽 분위기 물씬 나는 건물
차양과 간판, 발코니의 화분들
레스토랑의 감각적인 포스터 간판


방금 전까지 행복으로 가득했는데, 사소한 이유로 언쟁을 하고 만다. 70일간의 여행 중 다툼의 주요 원인은 고작 식당 선정이었다. 써놓으니 더욱 별 게 아니지만, 문제는 인간이 삼시 세끼를 먹는다는 것. 성향의 차이와 나름의 배려가 불필요한 말다툼으로 이어지곤 했다.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사이였다면 없었을 갈등이 쌓이다가, 이날 크게 터지고 말았다.


점심 반주는 와인 한 병


길바닥에서 언성 높이기엔 다소 부끄러우니, 결국 적당한 곳에 들어선다. 순례길 위의 대도시답게 대부분의 레스토랑에 '순례자 메뉴'가 있다. 다양한 선택지 중 에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를 고르는 방식이다. 어디든 평균 이상인데 식당 문턱을 넘는 것이 왜 그토록 숙고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시에스타 시간이 되었으므로 숙소에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부킹닷컴에서 예약한 이번 숙소는 호스텔이 아니라 에어비앤비 같다. 일반 건물에 위치해 있고, 넓은 공간에 부엌도 딸려있다. 그래서 저녁은 간단히 시장을 봐서 편하게 먹기로 한다.


보티네스 저택 뒤편
시드 공원에서 바라본 보티네스 저택


익숙해진 거리를 산책하듯 걷는다. 기대 없이 들린 중심가의 시드 공원(Parque del Cid)이 특히나 편안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하는 현지인의 여유가 잔잔히 마음을 물들인다. 현지 청소년들이 왁자지껄하게 젊음을 뽐내며 몰려다니는 모습도 귀엽게만 보인다. 때로 미세하게 풍기는 대마초 냄새는 전혀 귀엽지 않지만. 공원 한편에는 로마 시대 유적인 수로의 일부도 남아있다. 보티네스 저택을 담느라 정신이 없어서 사진은 못 남겼다.


저녁은 와인을 곁들인 이것저것


이렇게 순례길의 주요 도시가 아닌, 레온 자체를 만나본다. 역사가 길어 보이는 카페와 폰케이스 전문 판매점 같은 현대적인 가게가 공존하고 있는 중심가 또한 이 도시의 일부다. 힘들게 걸어서 입성하지 않았기에, 레온은 순례길보다 여행지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레온 성당의 야경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만끽한 밤공기가 여즉 생생하다.


험준한 산맥 사이의 고속도로를 달려


다음날. 버스 시간에 맞춰 느긋하게 숙소를 나선다. 1시간 반 남짓을 달리는 고속도로의 양 옆으로는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늘어선다. 지역 별로 차이가 큰 스페인의 문화는 이러한 지리적 요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지금은 곧고 평탄한 시멘트 길이 닦여있지만, 과거에는 인간의 두 발 혹은 동물의 네 다리로 쉽게 넘나들 수 없었을 테니까.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도시 중 하나인 오비에도에 도착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일의 버스표를 미리 구매하려는데, 사람도 많고 기계도 느리기 짝이 없다. 빨리빨리의 국가 출신은 오늘도 인내심을 길러본다. 즐거운 여행 중이니까요!


폰깔라다 분수(Fuente de Foncalada)


무더운 늦여름 날씨에 생맥주부터 한 잔 들이켠다. 곁들여 나온 올리브 안주의 맛에 감탄하며 한차례 더위를 식힌 뒤 중심가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본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9세기의 분수가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설명을 읽어봐도 큰 감흥은 없어 아쉽다.


흩날리지 않는 쌀알!!!


오후 3시라는 애매한 시간대.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SUSHI'라는 글자를 만난다. 이왕이면 한식당을 가고 싶긴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들어가 보니 무려 무한리필 집이다! 된장국의 익숙함에 마음이 녹아내렸고, 흩날리지 않는 쫀쫀한 쌀알에 위장이 쾌감의 비명을 질렀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무한리필 스시집을 몇 차례 방문했다. 인당 특정 금액을 내면 원하는 메뉴를 제한 없이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음료와 디저트는 별도 구매다. 오비에도의 이 식당은 QR을 찍어서 휴대폰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최첨단 방식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방문했던 식당의 경우, 메뉴의 고유 넘버를 적거나 메뉴 옆에 체크한 종이를 직원에게 직접 건네는 방식이었다. 전자든 후자든, 양껏 시켜 먹으며 한식을 향한 진한 그리움을 달랬다.


오비에도 대성당(Catedral de San Salvador)


만족스럽게 채운 배를 두드리며 광장으로 향했다. 새파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대성당의 첨탑이 매력적이다. 배낭의 가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초록색 나시 원피스를 처음으로 꺼내 입었으므로 열심히 사진 모델이 되어본다. 배낭과 등산화로 든든히 무장한 순례자도, 원피스와 슬리퍼로 몸과 마음이 가벼운 여행객도, 전부 나다.


형형색색 오비에도 건물들
작은 성당과 샛노란 건물
평범하지 않은 디테일을 지닌 평범한 건물


동네 산책이 곧 여행이다. 유리 벽면의 고층빌딩 숲도 성냥갑 같은 아파트도 아닌,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건물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넓은 공원 구석에 앉아 한껏 여유를 들이켠다. 유아차와 강아지가 가득한 공간에서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문 열고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타는 엘리베이터를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경험하고 신기해했던 것이 십여 년 전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오래된 건물에는 여전히 이런 승강기가 남아있더라. 두 사람을 수용하기엔 다소 빡빡한 크기와 계단과 크게 차이가 없을 느릿한 속도가 있지도 않은 향수를 불러온다. 물론 그 애틋함을 내 인생에 굳이 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일상 속 모든 찰나가 새롭고 특별하여 사랑스러운 순간,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짜릿하고 생생하게 느낀다. 순례자의 정체성은 잠시 내려놓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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