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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걷고 싶었던 길과의 조우

D+21~23 |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내가 밟는 이 길이 바로 까미노

by 누비
출발. 오비에도(Oviedo)
경유. 코바동가(Covadonga)
도착. 레온(León)



걷고 있던 까미노 프랑스길을 벗어난 김에, 조금 더 샛길로 빠져본다. 피코스 데 유로파 국립공원(Parque Nacional de los Picos de Europa) 끄트머리의 코바동가 호수가 무척 아름답다는 후기를 발견하여 여기로 목적지를 잡았다. 한국어 후기가 거의 없어서 구글링에 많이 의존했다.


오비에도에서 출발하여 캉가스 데 오니스(Cangas de Onis)에서 버스를 환승하는 약 2시간 남짓의 여정이다. 당일치기의 경우 캉가스 데 오니스 버스역에서 1일권 구매 후 곧장 호수까지 갈 수 있다. 숙소 1박을 예약한 우리는 호수까지 가는 길에 있는 코바동가 마을에서 일단 하차한다.


가파른 벼랑 위 핑크색 성당과 낮달
숙소 테라스에서 보이는 산책길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야에 가득 담긴 독특한 성당(Basílica de Santa María la Real de Covadonga)에 저절로 마음을 빼앗긴다. 디즈니 성으로 유명한 독일 퓌센이 떠오를 정도. 우선 방문 목적인 코바동가 호수를 가기 위해 숙소에 배낭을 맡긴다. 버스정류장 옆 부스에서 1인 9유로에 왕복 1회의 일일권을 구매할 수 있다. 코바동가에서 버스 타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캉가스 데 오니스 역에서 오는 이들이 많기도 하고, 길이 험해서 입석을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류장 근처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11시 반쯤 버스에 오른다.


안전벨트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상향선의 경우 진행 방향의 오른편에 앉아야 풍경이 더 좋다. ALSA 버스가 독점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 노선은, 버스 기사의 신들린 운전 실력이 필수적이다. 아스팔트길이 구불구불하고 좁아서 일반 차량은 진입할 수 없다. 무전으로 계속 반대편 버스 위치를 확인하고, 외길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정차할만한 곳에서 대기한다. 호수에 도착하기까지 30여분이 소요되며, 무사히 도착하니 박수가 터졌다.


코바동가 호수 지도


주차장에 내리면 국립공원 직원이 지도 앞에서 간단하게 소개한다. 코바동가 호수란 에놀 호수(Lago Enol)와 에시나 호수(Lago La Ercina)를 말한다. 두 개의 호수를 양 옆으로 한 번에 볼 수 있는 전망대(Mirador de Entrelagos)도 있고, 각각의 호수를 크게 도는 트래킹 코스도 있다. 직원의 추천 코스로 시작하면 이 지역을 소개하는 작은 박물관부터 방문 가능하다. 지역특산품에는 치즈도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다.


20230906_35.jpg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들
20230906_43.jpg 여유만만 나른함 한가득
20230906_104.jpg 풍경을 딸랑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라는 별칭에 걸맞게, 호숫가에서 풀을 뜯는 색색의 소들에게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내키는 대로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는 소들은 인간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구역에 잠시 방문한 우리 인간이 조심스럽게 소들을 피해 움직인다. 온사방의 소똥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걸음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긴 하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후각적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목가적 풍경 앞에 온갖 고민이 녹아내린다.


20230906_61.jpg 저 오솔길을 따라 끝까지 걸어보고 싶다
20230906_36.jpg 그림 같은 풍경


목에 풍경을 매단 소들이 풀을 뜯고 자리를 옮기면 짤랑짤랑 소리가 울려 퍼진다. 금속성의 쨍하고 날카로운 워낭소리가 신기하게도 평안한 화음을 만든다. 가만히 서서 눈으로는 풍경의 색채를, 귀로는 풍경의 음색을 담는다. 평화롭고 차분하여 그 어떤 번뇌가 차오르지 않는 여기가 바로 천국 아닌가. 행복하다.


20230906_77.jpg 바닥이 보이는 깨끗한 물
20230906_94.jpg 대자연 속에서 작아지는 인간
20230906_98.jpg 호숫가를 따라 트래킹


고르지 않은 흙길은 때로 진흙길이 되기도 한다. 오로지 걷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는 길. 그러다 문득 멈춰서 옆을 돌아보고 위를 올려다보면 아름다운 자연이 가득하다. 모든 감각으로 마주하는 생생한 자연의 존재감에 기꺼이 마음을 내맡긴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물과 산이 있는 경치가 영혼 일부를 충만하게 채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든다. 걷는 행위만으로도 오롯이 행복한 길. 이 길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순례길이 아닌가.


20230906_102.jpg Lago Ercina에서는 수영 낚시 금지입니다~
20230906_111.jpg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운 찰나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날이다. 두 눈에 담아 영혼에 새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자꾸만 핸드폰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청량한 날씨까지 도와주니, 화각에 담는 대로 작품이잖아요. 코바동가 호수에서 찍은 모든 사진 속의 우리 얼굴은 숨길 수 없는 행복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20230906_120.jpg 소 하나에 이토록 다양한 색채라니
20230906_128.jpg 모든 요소가 이국적인 풍경
20230906_129.jpg 다정하게 볼을 맞대고 있는 두 소
20230906_134.jpg 태연한 길막.. 당연히 내가 피해 감..


버스에서 내려 사방이 탁 트인 정경을 마주한 순간, 아부지와 나는 시선을 맞추고 동시에 말했다. 1박 더 하고 내일 또 오자! 20일간의 여행 내내 같은 도시에서 연박한 적이 없었건만, 여기는 반드시 한 번 더 와야 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먼 곳까지 왔는데 후회를 남길 수는 없으니까!


20230906_135.jpg 오늘은 안녕, 내일 또 만나


내일의 재회를 고대하며 미련을 털어낸다. 오후 4시쯤 정류장으로 돌아갔는데, 대기만 40분이 걸린다. 오전에 올라와 저녁 전에 내려가는 다른 방문객들과 시간대가 겹칠 수밖에 없다. 가족 단위가 많고, 스페인 사람들이 대다수인 점이 인상적이다. 반려견을 데리고 온 팀도 많다. 일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스페인에서는 동물을 화물칸에 태워야 하는데, 여기 버스에는 캐리어가 구비되어 있더라. 좌석에 앉은 인간에게도 힘든 구불거리는 길을 버스 하단 화물칸에서 견뎌야 하는 아이들이 안쓰럽지만, 현지인들은 거기까지 감안하고 데려왔으리라. 이것도 문화 차이로 봐야만 하는 거겠지.



코바동가 호수의 두 번째 방문까지 정리하고 넘어가 보자. 첫날보다는 날씨가 아쉬웠지만, 다시 만나도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길 또한 우리의 순례길이라 정의 내렸기에, 이날은 GPS를 켜고 순례길을 걸을 때처럼 걸었던 흔적을 기록한다. 지구별 위에 발자국이 남은 길이 또 생긴다. 이렇게 내 세상은 넓어진다.


20230907_22.jpg 에놀 호수 (Lago Enol)
20230907_30.jpg 에시나 호수 (Lago Ercina)


오늘은 아부지와 따로 걸어보기로 한다. 어제 걸었던 트래킹 코스를 거꾸로 걸어보고 싶다는 아부지와 헤어져 전망대로 올라간다. 평평한 돌멩이 위에 앉아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의 표면을 가만히 응시한다. 제멋대로 일렁이던 감정들이 고요히 침잠한다. 호수에 반해서 마음을 빼앗긴 경험은 처음이다. 벅차게 행복하다.


20230907_20.jpg 인간이 지나가든 말든 풀을 뜯지
20230907_40.jpg 험한 돌길도 자유롭게 넘나들지
20230907_53.jpg 아이거 북벽이 떠오른다던 아부지


삼삼오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 사이를 걷자니 문득 외로워진다. 아부지를 마중 나가기 위해 어제의 길을 되짚어 걷는다. 어제와 다른 건 하늘뿐임에도 새로운 느낌이다. 이내 열정적으로 워낭소리를 담고 있는 아부지를 발견하고 신나게 양팔을 흔든다. 채 2시간도 채우지 못한 헤어짐이 진한 애틋함을 피워낸다.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함께 걷는다. 방문객이 적지 않음에도 부지가 워낙 넓어 모든 길이 여유롭다.


20230907_86.jpg 안녕, 동물 친구들


대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코바동가 호수에 작별을 고한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코바동가 시내는 어제보다 북적인다. 스페인 레콩키스타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는 코바동가 전투 승리일인 9월 8일마다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슬람이라는 외부 세력을 몰아냈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크지만, 성모가 발현이란 종교적인 의미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이곳을 찾으며, 전야에는 산타마리아 라 레알 코바동가 성당에서 밤새 예배가 진행된다.


20230907_125.jpg 2023년 코바동가 축제
20230907_103.jpg 8세기 코바동가 전투를 승리로 이끈 펠라요 국왕
20230907_90.jpg 성 같은 성당
20230907_100.jpg 가까이서 보면 생각보다 크다
20230907_109.jpg 성당 뒤편이 상당히 특이한 편
20230907_102.jpg 성당을 가득 메운 신도들과 경건한 예배


빌바오 여행에서 바스크 지역 축제를 만났던 것처럼, 코바동가에서도 운 좋게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첫날 묵었던 숙소가 다음날 풀부킹인 이유가 이 축제 때문이었다. 둘째 날은 성당 옆에 위치한 호텔을 지른 덕분에 한층 생생한 축제 분위기를 체감했다. 아부지는 한밤중의 폭죽 소리에 바로 뛰쳐나가 더욱 생생하게 축제를 만끽하고 오셨다고.


20230907_113.jpg 한국의 가족들을 위해 성소에 초를 밝혔다
20230906_154.jpg 코바동가 성소(Santuario de Nuestra Señora de Covadonga)


다만 9월 8일 당일 아침은 고요했다. 이날은 성모 발현을 기념하여 성모상을 코바동가 호수까지 가지고 간 뒤 호수 안에 담그는 행사를 진행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는, 그래서 버스가 없다는 것. 호수까지 올라가는 버스도, 캉가스 데 오니스까지 내려가는 버스도! 설상가상으로 택시 또한 거의 없는 상황. 호수로 가는 택시만 있어서 난감하던 차에, 다행히 요금을 조금 더 얹어주는 것으로 택시 기사와 합의를 볼 수 있었다.


20230908_21.jpg 로마시대 다리 (Puente medieval de Cangas de Onís)
20230908_26.jpg 어마어마한 경사각


캉가스 데 오니스에서도 축제가 진행되지만, 오후부터 시작되는 관계로 마을 구경만 잠시 하고 다시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오픈 전이기에 배낭을 멘 채로 이곳저곳 둘러본다. 로마 시절의 다리는 오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튼튼하게 남아있다. 역사를 담고 있는 길을 걷는 기분은, 역시 만족스럽다.


20230908_46.jpg 여유로운 김에 오랜만의 드로잉
20230908_51.jpg 시드라를 따라 마시는 기계


이 지역 특산품 중에는 사과 사이다 술 시드라(Sidra)가 있다. 탄산이 핵심인 음료이기에, 가장 맛있는 비율의 거품이 생기도록 직원이 병을 높이 들어 직접 따라주는 술이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간 레스토랑에서는 시드라 전용 술 따라주는 기계를 함께 내왔다. 병에 관을 삽입하고 위편의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술이 나온다. 세상 어느 곳이든, 주당들은 맛있는 술에 다소 진심인 것이다. 아쉽게도 시드라 자체는 썩 맛있지 않았다.


캉가스 데 오니스에서 출발하여 오비에도를 거쳐 약 5시간 만에 드디어 레온으로 돌아온다. 숙소 5분 거리의 코인빨래방을 찾아가 묵혀둔 한아름의 빨래를 해치운다. 아부지는 이미 순례길 위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과 대성당 앞 레스토랑에서 커다란 맥주를 드시고 계신다.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광장에 유난히 사람이 많다. 불금은 여기서도 통하나 보다. 저마다의 순례길 추억을 공유하며, 밤이 깊어간다.


20230908_55.jpg 레온대성당 야경


대성당은 며칠 전도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답지만, 대성당을 바라보는 나는 분명히 변화했다. 예상하지 못한 지역을 방문하여 기대하지 못한 축제를 만났고,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끌어안았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역사를 배우며 영혼이 깊어짐을 느낀다. 순례길이 아닌 곳에서 순례자가 아닌 모습으로 순례길의 정의를 다시 정의 내린 나는, 순례길을 따라 올곧게 걸어왔던 며칠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르다.


고단한 순례길의 여정 또한 여행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순례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했음을 느낀다. 여정 하나하나가 쌓여간다. 나의 까미노는 어렴풋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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