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4 | 뜻밖의 만남으로 피어나는 추억
출발. 레온(León)
시작. 빌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aramo)
종료.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해냄. 3시간 / 11.61km
자주 왔다 갔다 해서 익숙해진 레온의 버스정류소로 향한다. 부르고스에 이어 스페인의 북부 여행의 거점지가 되어준 레온에게 속으로 작별을 고하면서. 부지런한 아부지는 출발 전에 레온 성당에 마지막으로 다녀오셨다. 9시에 출발한 버스는 30분가량 달려 빌라당고스 델 파라모에 도착한다. 능숙하게 짐칸에서 배낭을 꺼낸다.
아부지가 나의 씩씩한 걸음을 신기해한다. 무념무상으로 성큼성큼 걷는다고 답한다. 힘이 있을 때 더 빠르게 더 많이 걸어야 하니까. 아부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걷고 계시느냐 되묻는다. 아부지는 마디게 마디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라고 말한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아부지는 발뒤꿈치부터 시작하여 발바닥을 전부 바닥에 누르는 걸음걸이 습관이 있다. 복잡한 고찰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길을 음미하며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대지를 꾹꾹 눌러 걷고 계신단다. 함께 걷는 우리는 걸음마저도 이토록 다르다.
올곧은 직선로를 딱 3시간만 걸었기 때문에, 이날은 특별한 사건도 사진도 없다. 오랜만의 순례길이니 몸풀기 목적으로 잡은 일정이기도 하고. 무리는 금물이라는 점을 앞선 길에서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게다가 날이 꽤 더워서 더 걸었으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시행착오 덕분에 나에게 맞는 루틴이 잡혀가고 있다.
평이 좋아 예약한 알베르게인데, 알고 보니 한국 방송에 나왔더라. 친절하게 체크인을 도와준 주인장이 혹시 god를 아느냐고, 여기서 묵었다고 자랑을 한다. 당연히 알죠! 그들이 순례길을 걸었던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씻고 나오자마자 바로 유튜브에 검색을 했다.
내가 방금 지나친 그 장소가 카메라에 이미 담겼었다니! (god '같이 걸을까' 방송 링크)
신기하고 신난 마음에 부풀어, 알고 있는 모든 팬지에게 톡을 보낸다. 중3 때 함께 아이돌 덕질을 했고 여전히 데니안의 팬인 친구는 얼마 전 추억을 헤집다가 나를 떠올렸다며 즐거워한다. 다른 덕질로 연을 맺고 가까워진 언니는 안 그래도 여행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며 반가워한다. 역시 다른 덕질로 친해진 언니는 전광판 사진을 보내며 지금 god 콘서트에 있다고 놀라워한다. 뜻밖의 우연이 따뜻한 기억과 기꺼운 연락을 꽃피우다.
비단 방송이 아니더라도, 알베르게 자체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1층의 공용공간은 물론이고, 계단과 침실의 벽면마다 형형색색의 그림이 한가득 걸려있다.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담긴 다채로운 화풍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매력적이다. 예술가인 주인이 직접 그린 그림도 많지만, 방문한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도 많다. 제일 아래 사진 오른편의 이젤 위 그림은, 우리와 묵은 한 순례자가 이날 그린 것이다. 자유롭고, 멋지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니 술술 흘러넘치는 이야기보따리에 자리를 옮긴다. 과음은 안된다는 알베르게 주인장의 조언을 뒤로하고, 아직도 해가 한창인 거리로 나선다. 현지인이 많은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바탕 수다를 떨고, 가득한 배를 두드리며 저녁을 먹으러 간다. 일전에 스페인 북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는 동행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제대로 된 스페인식 문어 요리를 처음 먹어본다.
뽈뽀(Pulpo)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다. 특히 멜리데(Melide)가 가장 유명한데, 우리는 아쉽게도 스쳐만 지나갔다. 문어를 사용한 요리가 내륙 지역에서 손꼽히게 된 사유가 꽤나 궁금하다. 유명하기 때문에 많이 팔리고, 많이 팔리니 순환율이 좋아서 계속 재료의 질이 높아지는 선순환의 영향도 있지 싶다. 부드러운 살과 느끼하면서도 매콤한 소스가 잘 어우러지는 요리로, 문어의 신선도와 숙성도가 무척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