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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다시 돌아온 순례길

D+24 | 뜻밖의 만남으로 피어나는 추억

by 누비
출발. 레온(León)
시작. 빌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aramo)
종료.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해냄. 3시간 / 11.61km



6일 만의 순례길 복귀다. 대도시의 경우, 진입로와 퇴로는 대부분 재미가 없더라. 도시 안에 두기 힘든 자동차 판매점 같은 창고형 가게 또는 대형마트 등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지루한 아스팔트에다가 매연이 지독하고 시끄러운 길은, 굳이 걷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로 레온을 벗어나 다음 마을부터 걷기로 한다.


자주 왔다 갔다 해서 익숙해진 레온의 버스정류소로 향한다. 부르고스에 이어 스페인의 북부 여행의 거점지가 되어준 레온에게 속으로 작별을 고하면서. 부지런한 아부지는 출발 전에 레온 성당에 마지막으로 다녀오셨다. 9시에 출발한 버스는 30분가량 달려 빌라당고스 델 파라모에 도착한다. 능숙하게 짐칸에서 배낭을 꺼낸다.


오늘도 씩씩하게 출발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꽤 내렸다는데, 우리의 재시작을 응원이라도 하듯 하늘이 쾌청하다. 다만 비의 흔적은 흙모래의 도보길에 진득하니 남아 있어서, 부득이하게 자전거 도로 위로 걸음을 옮긴다. 자전거의 알림 벨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에 신경을 쓴다. 애매한 기점 때문인지 순례자들을 자주 마주치진 않지만, 만나는 이들은 어김없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건넨다.


넓게 펼쳐진 옥수수밭
마실 나온 달팽이 구경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아부지가 나의 씩씩한 걸음을 신기해한다. 무념무상으로 성큼성큼 걷는다고 답한다. 힘이 있을 때 더 빠르게 더 많이 걸어야 하니까. 아부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걷고 계시느냐 되묻는다. 아부지는 마디게 마디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라고 말한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아부지는 발뒤꿈치부터 시작하여 발바닥을 전부 바닥에 누르는 걸음걸이 습관이 있다. 복잡한 고찰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길을 음미하며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대지를 꾹꾹 눌러 걷고 계신단다. 함께 걷는 우리는 걸음마저도 이토록 다르다.


아부지의 뒷모습을 유독 많이 담았던 날
20230909_14.jpg 유난히 신나 보이는데요
산 마틴 델 까미노 (San Martine del Camino) 입구의 순례자
슬슬 시야에 들어오는 마을


올곧은 직선로를 딱 3시간만 걸었기 때문에, 이날은 특별한 사건도 사진도 없다. 오랜만의 순례길이니 몸풀기 목적으로 잡은 일정이기도 하고. 무리는 금물이라는 점을 앞선 길에서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게다가 날이 꽤 더워서 더 걸었으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시행착오 덕분에 나에게 맞는 루틴이 잡혀가고 있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다리


딱 봐도 역사가 깊어 보이는 다리를 만났다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의 이름은 Puente de Orbigo Paso Honroso. 엄청난 길이, 견고한 구조와 벽돌의 형태가 만들어내는 위용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반드시 건너게 된다. 다리가 만들어진 목적인 오르비고 강 자체는 크지 않아서 의외다. 매년 여름에는 다리 밑에서 중세의 마상 시합을 여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산 미겔 알베르게 (Albergue San Miguel)


평이 좋아 예약한 알베르게인데, 알고 보니 한국 방송에 나왔더라. 친절하게 체크인을 도와준 주인장이 혹시 god를 아느냐고, 여기서 묵었다고 자랑을 한다. 당연히 알죠! 그들이 순례길을 걸었던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씻고 나오자마자 바로 유튜브에 검색을 했다.


내가 방금 지나친 그 장소가 카메라에 이미 담겼었다니! (god '같이 걸을까' 방송 링크)


신기하고 신난 마음에 부풀어, 알고 있는 모든 팬지에게 톡을 보낸다. 중3 때 함께 아이돌 덕질을 했고 여전히 데니안의 팬인 친구는 얼마 전 추억을 헤집다가 나를 떠올렸다며 즐거워한다. 다른 덕질로 연을 맺고 가까워진 언니는 안 그래도 여행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며 반가워한다. 역시 다른 덕질로 친해진 언니는 전광판 사진을 보내며 지금 god 콘서트에 있다고 놀라워한다. 뜻밖의 우연이 따뜻한 기억과 기꺼운 연락을 꽃피우다.


20230909_31.jpg 부엌 바깥의 중정
20230909_33.jpg 널찍한 공용 공간
알베르게 한편의 아트존


비단 방송이 아니더라도, 알베르게 자체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1층의 공용공간은 물론이고, 계단과 침실의 벽면마다 형형색색의 그림이 한가득 걸려있다.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담긴 다채로운 화풍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매력적이다. 예술가인 주인이 직접 그린 그림도 많지만, 방문한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도 많다. 제일 아래 사진 오른편의 이젤 위 그림은, 우리와 묵은 한 순례자가 이날 그린 것이다. 자유롭고, 멋지다.


늦은 점심식사


아부지가 마을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오신다. 고소한 삼겹살과 매콤한 고추장을 야심 차게 계획했는데, 생삼겹살이 아니라 보존을 위해 소금에 절인 고기를 사 오는 바람에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샐러드처럼 만든 밥과 라면까지 더해 배부른 식사를 한다. 야외 중정에서 식사하는 도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처마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와인 1병으로 아쉬워서 하우스와인을 슬금슬금 따라 마시는데, 다른 한국인들에게 건너 건너 전해 들었던 한국인 순례자 한 분과 합석을 하게 된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니 술술 흘러넘치는 이야기보따리에 자리를 옮긴다. 과음은 안된다는 알베르게 주인장의 조언을 뒤로하고, 아직도 해가 한창인 거리로 나선다. 현지인이 많은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바탕 수다를 떨고, 가득한 배를 두드리며 저녁을 먹으러 간다. 일전에 스페인 북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는 동행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제대로 된 스페인식 문어 요리를 처음 먹어본다.


뽈뽀(Pulpo)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다. 특히 멜리데(Melide)가 가장 유명한데, 우리는 아쉽게도 스쳐만 지나갔다. 문어를 사용한 요리가 내륙 지역에서 손꼽히게 된 사유가 꽤나 궁금하다. 유명하기 때문에 많이 팔리고, 많이 팔리니 순환율이 좋아서 계속 재료의 질이 높아지는 선순환의 영향도 있지 싶다. 부드러운 살과 느끼하면서도 매콤한 소스가 잘 어우러지는 요리로, 문어의 신선도와 숙성도가 무척 중요하다.


조개껍데기와 물집 가득한 발, 비로소 산티아고
도레미 순례자들


어둑해질 무렵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내일은 또 내일의 길이 펼쳐져 있기에, 과도한 흥은 자제해야 한다. 속도도 목적지도 다르니 짧은 만남은 여기서 끝이다. 서로의 순탄한 순례길을 빌며, 우연한 찰나의 인연에게 작별을 고한다. 다시 만나게 된 순례길, 이제 클라이막스를 향해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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