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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마음의 길 끄트머리에서

D+25~26 | 익숙해진 고단함에 꺾이지 않는 마음

by 누비
시작.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종료. 아스토르가(Astorga)
해냄. 4시간 반 / 16.32km



시작. 아스토르가(Astorga)
종료.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
해냄. 5시간 / 20.04km



산티아고 프랑스길은 보통 세 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육체의 길, 마음의 길, 영혼의 길. 육체의 길은 생장에서 부르고스까지를 의미하나, 마음의 길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한국의 일부 서적에서는 부르고스에서 라바날을 이른다는데, 구글링을 하니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를 마음의 길이라 정의 내린 글도 더러 보인다. 약 900km가량의 순례길을 길이로 세 등분하는 것이 아니라, 산악지대와 평지 등의 지형과 중심도시를 기준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약간의 의견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전자의 정의를 따라가기로 했다.


밝아지는 하늘 위에 반짝이는 그믐달
형형색색의 아침 하늘


새벽 즈음에 출발하여 달을 향해 걷는 아침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매일매일 달라지는 달의 모양을 보며, 하루하루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느낀다. 담백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평안함이 구석구석으로 퍼져간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루들만 모아 인생을 꾸려나가고 싶다. 지구 반대편에서 실시간으로 진행 중인 작금의 갈등과 절망이 마음 한켠을 짓누르기에 그 갈망은 더더욱 깊어진다.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
이내 짙은 구름 뒤로 쏙


한낱 미물의 마음이 싱숭하건 말건, 태양은 언제나처럼 떠오른다. 이 길 위에서 제대로 보는 일출은 처음이라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동해 바다의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주로 만나다가, 지평선을 밝히며 나타나는 새빨간 태양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다. 닮은 듯 다르게 느껴지는 하늘을 보며 고국을 떠난 이들이 위로받았을 쓸쓸한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 본다.


까끌한 흙의 도보와 아스팔트 자전거길
엇갈린 비행운이 그려내는 엑스자


오늘도 새파란 하늘 위에 새하얀 비행운이 그려진다. 곡선의 구름만 가득해야 할 자연의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인간이 만들어낸 불규칙한 직선이 존재감을 뽐낸다. 비행기가 내뿜는 탄소의 양을 생각하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진 않는다. 미래 세대를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에 죄책감이 생긴다.


선연한 X자는 그만하라는 계시가 아닐까, 라던 생각이 엊그제 같다. 까미노의 절반을 넘기고 난 오늘, 기억의 미화로 추억이 되어버린 그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본다. 이리저리 휘청이던 나날들은 어떻게든 견뎌낸 다음에야 비로소 애틋하고 벅차게 간직되는 법이다. 그만하라는 계시를 받고도 포기하지 않은 과거의 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무뎌지지 않는 힘듦에 적응하여 여기까지 도달한 현재의 나를, 기특하다 토닥여 본다.


20230910_19.jpg 나무 밭 사이를 걸어


많이 걸어오긴 했는지, 풍경과 식생이 사뭇 다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축사도 만나고, 묘목들을 키우고 있는 밭도 지나친다. 어린 송아지는 한 마리씩 야외 울타리에 분리 사육하고, 나무는 같은 종끼리 모아서 관리한다. 널찍한 공터에 천막을 치고 순례자를 위해 신선한 과일을 마련해 둔 공동체도 있다. 순례자들은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 도네이션을 하고, 따뜻한 커피와 든든한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십자가
저 먼 곳을 바라보는 순례자 두 사람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가까워질수록, 길 곳곳에 표식과 기념물이 많아진다. 여기 순례길 맞소, 라고 인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흙먼지로 뒤덮인 신발은 원래의 검은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선크림을 듬뿍 발라도 조금씩 더 어두워지는 얼굴과 팔다리가 자연스럽다. 하중을 견뎌주는 무릎은 보호대로 고정한다. 힐긋 보아도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틀림없는 순례자의 행색이다.


너무 귀여워서 넣지 않을 수 없었던 사진
이게 육교라니


지도를 확인해 보니 오늘의 종착점인 아스트로가에 거의 다 왔다.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다가 듣도보도 못한 육교의 등장에 절로 탄식이 터진다. 두 발과 자전거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유익한 형태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가 되지만, 기찻길 건널목 하나만으로 천 걸음은 아꼈으리란 생각에 몸의 힘은 쭉쭉 빠진다.


가까스로 마을 입구에 들어선다. 미리 보아둔 알베르게 앞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있는데, 직원이 나와 오늘은 영업을 안 한단다. 이 알베르게에서 제공한다는 맛있는 저녁만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근처 만만한 공립 알베르게로 향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열댓 명이 한 방에 묵어야 하는 견딜만한 불편함이 벌써 괴롭다.


20230910_49.jpg 알베르게 옥상에서 바라본 아스트로가


공립 알베르게는 가격이 저렴한 만큼, 직원이 아닌 자원봉사자들이 관리하고 운영한다. 연세 지긋한 현지인의 느긋함과 규칙에 빡빡한 미국인의 유쾌함이 공존한다. 본인도 순례자라는 미국인 여성은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착하여 자원봉사를 하고 있단다. 여기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풍경이라며 안내에 따라 옥상에 오른 순간, 탄성이 터져 나온다. 탁 트인 아스트로가의 전경이 형언하기 힘든 평온함을 마음 가득 밀어 넣는다.


주교궁 (Palacio de Gaudí Astorga)
아스트로가 대성당 (Cathedral of Santa María de Astorga)


광장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피자와 맥주로 점심을 먹는다. 축축 늘어지던 몸 컨디션이 기어이 바닥을 친다. 역사가 깊은 이 도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서 간단히 산책을 한다. 무려 가우디의 초기작이라는 주교궁을 꼭 들어가고 싶었으나, 하필 씨에스타에 걸린다. 바로 옆에 위치한 거대한 대성당의 세월 가득한 외관을 한참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특산품인 초콜릿 향기가 골목 곳곳에서 풍긴다. 순례자가 아닌 현지인 관광객들로 꽤나 북적이는 도시다.


결국 혼자 알베르게로 돌아가 삐걱이는 파란색 2층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한다. 저녁은 컵라면으로 해결한다. 꽤나 굵은 빗방울이 옥상의 경치를 톤다운 시킨다. 구석구석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은 도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여 무척 섭섭하다. 언젠가 스페인 북부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아스트로가만큼은 반드시 돌아오리라. 골동품 상점과 초콜릿 가게에서 지갑을 활짝 열고 말 테다.


안녕, 아스트로가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새벽, 날씨 어플을 켜본다. 한 시간 정도 후에 비가 그친다는 예보를 믿어보기로 하고, 알베르게 바로 앞 카페로 향한다. 이른 아침에 여는 가게가 많지 않다 보니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토르띠아와 커피, 오렌지 주스의 익숙한 아침을 먹는다. 오후를 위해 작은 초콜릿 두 봉지도 챙겨든다. 우비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잦아든 빗방울에, 거의 마지막으로 알베르게를 나선다. 어스름한 새벽의 빛깔 속으로.


오늘도 씩씩하게 걸어보자
태양의 길


축축한 흙길과 촉촉한 공기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증명한다. 반나절의 휴식이 온전한 컨디션 회복이란 기적을 선사하진 않았지만, 두 다리만은 씩씩하게 움직인다. 어제보다 더 걸어야 하는 길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까미노에 익숙해진 마음은 더 이상 쉽게 꺾이지 않는다.


기꺼이 걸음을 옮길 수 있는 풍경
다양한 도안과 색깔의 아트 쎄요
순례자 여권에 남긴 아트 쎄요


걷다 보니 길 위에 테이블 하나가 보인다. 실링 왁스를 사용하여 아트 쎄요를 찍어주는 예술가다. 원하는 만큼 도네이션을 하고 도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나는 세상의 끝 피에스타를, 아부지는 힘차게 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를 택한다. 입체감 넘치는 쎄요 덕분에 순례자 여권이 도톰해진다. 작은 이벤트 하나에 마음이 풍성해진다.


누가 봐도 이 길은 까미노
길 위의 모두가 순례자


오늘은 함께 걷는 순례자들이 유난히 많다. 속도와 박자가 다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인사를 건넨다. 저마다의 이유와 목적으로 이 길 위에 서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진다. 다들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리라. 확연히 달라진 식생을 다시 한번 느끼며, 순례자 속에 녹아들어 계속 걸음을 옮긴다.


울타리에 매달린 십자가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평탄한 지형이 들쑥날쑥 오르락내리락 산길로 바뀌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마음의 길 끄트머리에 도달한 것이다. 험난한 육체의 길을 지나 지루한 마음의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얼마나 변화했던가. 상상하고 꿈꾸던 길을 직접 두 발로 딛고 선 채,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끌어안는다. 어느새 제법 순례자의 몸과 마음을 지니게 된 나는, 산티아고 마음의 길 끝자락의 라바날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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