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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여력 없는 육체에 깃드는 여유 없는 마음

D+8~9 | 무슨 생각을 해 그냥 걷는 거지

by 누비
시작. 나바레떼(Navarrete)
종료. 나헤라(Nájera)
해냄. 4시간 반 / 15.81km



시작. 나헤라(Nájera)
종료.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해냄. 5시간 반 / 21.73km



이틀 연속으로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길을 나섰다. 손전등 빛에 의지하며 칠흑 같은 어둠을 뚜벅뚜벅 걸었다. 혼자라면 무서워서 못 걸었을 것만 같은 묵직한 암흑. 가로등조차 없는 길에서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니, 총총히 박힌 별들이 아스라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고요해서 땅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 소리마저 귓가에 닿았다.


특출나지 않은 길을 계속 걷는다는 것


나바레떼에서 나헤라까지는 배낭을 메고 걸었다. 나헤라에서 도밍고까지는 오르막이 있길래 동키를 사용했다. 생장 순례자 사무소에서 받았던, 구역 별로 거리와 고도를 그래프로 정리한 종이 한 장이 순례길에서의 판단에 큰 도움을 준다.


이거 없었으면 어쩔 뻔...


아늑한 강변과 붉은 석벽이 인상적인 나헤라. 한 때 나바라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는 이 마을의 아기자기한 골목들에 고풍스러운 역사의 향기가 묻어났다. 처음으로 박물관도 방문했다. 드디어 새로운 문화를 엿보는 감각을 만끽하며 작은 박물관을 구석구석 구경했다.


History and Archeology Museum Najerillense
멧돌!!!!!!


마을 중심지에 들어서면 바로 시야에 가득 잡히는 붉은 산의 동굴들에서 발굴한 고대 유적 얘기가 많았다. 해당 지역의 본격적인 고고학적 연구가 수십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잊힌 고대의 역사를 파헤치는 짜릿함을 동경하여 한때는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는데.


독특한 형태의 적벽에 동굴들이 남아있다
Mesón Jamonero - 이베리코 플레이트


지역 특산물 위엄 풀풀 풍기는 이베리코 모둠과 지역 포도주를 마시며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넌더리를 내며 걸어온 길 옆의 포도밭에서 만들어졌을 와인은 달콤하고 부드기만 했다.


어둠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태양


다음날 이른 아침, 오르막을 걸어 나헤라를 벗어나자마자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을 맞닥뜨렸다. 앞선 순례자들 두어 팀의 랜턴 빛이 아른거린다. 너무 어두워서 순례길을 알리는 표시석이나 노란 화살표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례길을 걷는 내내 의지한 Gronze Maps 어플 덕분에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금방 눈치채고 방향을 틀었다.


해바라기 얼굴에 표정을 만든 앞선 순례자들


처음으로 노란빛이 남아있는 해바라기를 만났다. 스페인 하면 해바라기와 미친 기사님이 떠오르는 연뮤덕이기에 무척 반가웠다. 앞선 이들이 남겨 둔 스마일 덕분에, 애써 내 얼굴에도 미소를 걸며 한 걸음을 더 내딛을 용기를 채웠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난 걸어가고 있네.


더위에 땀을 뚝뚝 흘려가며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그저 길이 있으니 발을 내딛을 뿐. 최근에 어느 환경단체가 시위를 했다던 골프장을 지나며 인상을 찌푸리고, 그 골프장에 어울리는 재미없고 밋밋한 마을을 걸으며 짜증스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순례자의 실루엣


이 길들이 진정 "순례길"이라 명명될 가치가 있는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야 하는가.


마음이 여유롭지 않으니 자꾸 화가 났다. 나와 다른 존재이므로 당연히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가까운 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마땅치 않았다.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부렸다. 지금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이유들로.


하늘 위 선연한 X자는 그만 하라는 계시 아닐까


모든 찰나들이 후회와 반성으로 이어지며 차곡차곡 누적되고 있었다. 힘겹고 지난한 육체의 길이 끝날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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