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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이 길은 왜 쉬워지질 않는가

D+7 | 결국 혼자 걸어내야 하는 길

by 누비
시작. 로그로뇨(Logroño)
종료. 나바레떼(Navarrete)
해냄. 3시간 반 / 11.69km



이날도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잘 정돈된 대학 부지를 지나던 팜플로나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을 관통하는 까미노 길에 기분이 부풀었다. 조깅으로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현지인들과 가볍게 인사하며, 한국에 돌아가면 저들처럼 루틴한 삶을 살아 보리라는 다짐도 했다.


문제는 꽤 큰 저수지 부근에서 시작됐다. 지도에 나와있는 카페만 바라며 걸어왔는데, 흔적만 남기고 망해있었다. 챙겨 온 과일을 먹으며 간단히 허기를 달래고 목적지까지 어떻게든 걸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텀블러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을.


저수지 공원을 누비던 듬직한 다람쥐


그다음이야 뭐, 뻔하지 않은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포도밭 사이를 힘겹게 걸었다. 뜨거운 햇빛과 타는 갈증에 사로잡힌 채. 어떤 이는 비로 진흙탕이 되어버린 이 길에서 신발을 다 버렸다는 후기를 남겼더라. 하지만 우리는 흙먼지로 가득한 이 길에서 인내심을 다 버렸다. 길은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함에도, 길에 대한 기억은 어찌나 달라질 수 있는지.


사진 찍을 정신도 없었기에 아부지 사진 가져옴


포도밭을 지나니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 나왔다. 길 옆의 철조망에는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각양각색의 십자가들이 한가득 매달려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십자가를 매달았을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힘들기만 했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걸음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웠다.


외로웠다. 순례길을 시작한 이래 가장 짧은 시간을 걸은 날이자, 가장 사무치게 외로웠던 날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절감한 아득함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맴돌았다.


과로 중인 두 발


나바레떼에 도착하고 나서도 시련은 끊이질 않았다. 다음 날을 위해 일부러 마을 끝에 위치한 알베르게를 잡았더니, 마을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동선에 헛걸음이 많았다. 심지어 전날 마을 축제가 끝났다는 이유로, 이날은 모든 레스토랑이 문을 열지 않았다. 바에서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며 전날 로그로뇨에서 먹었던 타파스를 떠올렸다.


양송이 타파스 존맛탱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이 즈음부터 생긴 것 같다. 초반에는 너무 힘들어서 식욕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한국과는 전혀 다른 스페인의 시간대에 허탕을 치다 보니, 생존을 위해 억지로라도 몸을 현지에 맞춰야 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더위 속에서 시에스타라는 문화가 있는 이유를 온몸으로 체감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조금씩 꾸역꾸역 착실하게, 몸은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마음은 저 멀리 뒤떨어져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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