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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철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

D+27 | 다시 채우기 위해 비워내는 마음

by 누비
시작.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
종료. 몰리나세카(Molinaseca)
해냄. 7시간 / 25.37km



오늘 드디어 만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유명한 상징물, 철의 십자가를. 지금까지의 평지와는 다르게 높낮이가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걸어야 할 거리도 길어서, 동키를 신청하고 가벼운 몸으로 움직인다. 드디어 순례길의 마지막 단계, 영혼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새파란 새벽하늘에서 반짝이는 그믐달
그믐달 옆에서 반짝이는 건 금성이려나


감기 기운으로 이틀 정도 무거웠던 몸은, 비상약을 먹고 계속 잤더니 어느 정도 회복됐다. 고요하던 라바날의 골목길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포기해야 했으나,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쉼이었다. 캄캄한 마을을 빠져나와 차도 가장자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근처에 도보가 있긴 하지만, 어두운 새벽에 울퉁불퉁 흙길을 걷느라 체력을 소모하지 않기로 한다. Gronze 어플로 간간히 GPS를 확인해 가며 안전하게 걷는다.


마을 입구의 십자가


1시간 반 정도를 걸어 폰세바돈(Foncebadón)에 도착한다. 카페에 들어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신발끈을 다시 질끈 동여맨다. 각자의 걸음으로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눈에 익은 얼굴의 여성 순례자는 여기서 일출을 보고 가겠다며 돌멩이 위에 털썩 앉은 채 빵을 베어문다. 친절한 미소를 지닌 현지인들의 아침 인사를 받으며 다시 발을 떼 본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


매일같이 떠오르는 태양이건만, 밤새 두텁게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내는 일출은 매번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잠시 걸음을 멈춰 다채로운 색을 피워내는 아침 하늘을 응시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던 나이 지긋한 남성 순례자도 가만히 서서 태양을 바라본다. 잊지 못할 새날의 빛깔이 심장을 가득 채운다.


철의 십자가


폰세바돈에서 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길쭉한 십자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다. 성인 키의 3~4배 정도의 길이에, 한 품에 끌어안을 수 있을 둘레의 기둥이다. 가까이 가보니 다양한 물건들이 걸려 있다. 아래로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돌멩이들이 가득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들의 사진도 많고, 글자가 빼곡히 적힌 돌들도 있다.


순례자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가지고 온 돌멩이를 철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다. 누군가는 소원을, 누군가는 그리움을, 누군가는 걱정을, 누군가는 후회를, 누군가는 미안함을, 누군가는 미련을, 누군가는 슬픔을 담아서. 저마다 지니고 있던 짐을 훌훌 털어내듯 놓아버리는 곳이다. 이 길을 걸으며 차곡차곡 쌓아온 육체의 고통과 차분히 정리해 온 마음의 고민을, 작지만 단단한 철의 십자가 앞에 쏟아낸다.


한국에서부터 챙겨간 돌멩이 대체품


우리 부녀도 한국에서부터 배낭에 매달고 다녔던 키링을 철의 십자가 기둥에 걸어본다. 진짜 돌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하게 생긴 아크릴로 갈음 가능하리라. 4주 가까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떠올리며 짧은 기도를 한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건강하고 무사하게 걸을 수 있기를.


관광지스러운 안내판 앞에서
낮은 키의 풀들이 많은 고지대


손가락 두 마디 크기 물건 하나를 내려놓았을 뿐인데, 묘하게 기분이 홀가분하다. 여행 버킷리스트 최상단의 산티아고 순례길, 그 위에 서있음이 비로소 절절하게 실감 났기 때문일까. 이 길을 걷고 싶던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떠올려본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읽었던 수많은 순례길 여행기들, 사진과 영상으로 접한 이미지들. 타인의 경험과 시선으로 그려보던 이 길을, 나만의 시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중이라니!


여기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
곳곳의 십자가들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기도를 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해 본다. 스쳐 지나갔던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잊고 지냈던 이들의 추억을 하나씩 끌어내본다. 생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길 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되짚어본다. 크고 작은 연이 닿았던 그들 모두의 평안과 일상 속 기쁨을 진심을 다해 빌어본다. 다른 이를 위하는 마음은 충만한 행복감으로 차오른다.


만국기 사이의 태극기
커다란 소나무
지금까지의 길과는 사뭇 다른 식생


얼추 기도를 끝내니 새로운 풍경에 시선이 간다. 여행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씩씩하게 발을 움직인다. 청량한 푸른 색감의 하늘, 낮은 구름, 키가 작은 덤불 사이의 오솔길이 전부 새롭다. 핸드폰을 들어 끊임없이 박제하고 싶게 만드는 길이다.


저 멀리, 나보다 낮게 위치한 구름이 한가득
불이야!!!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마을 입구


슬슬 길은 내리막으로 접어든다. 발아래에 두고 있던 구름 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 El Acebo de San Miguel 마을 입구의 카페에서 시원한 오렌지주스 한 잔을 들이킨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한 순례자는 옆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린다. 고단한 두 다리에서 비롯된 고통 때문일까. 혹은 뒤늦게 찾아온 사무치는 감정 때문일까. 그를 도닥이는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에 함께 위로를 얻는다.


스산하기까지 한 마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중앙의 길을 따라 걷는다. 짙은 안개가 푸른 하늘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사람은커녕 개미 하나 보이지 않는 살풍경함은 버려진 마을이라는 인상을 준다. 코로나 이후 순례길의 많은 마을들이 경제난을 피하지 못하고 버려졌다던데, 여기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아기자기하게 반짝였을 돌벽 건물들을 상상하며 옷깃을 여민다. 해가 없으니 쌀쌀하다.


마을 출구 쪽에서 서성이던 강아지
그다음 마을의 입구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구경하던 말 한 마리
빈 집 테라스에 한가득 맺힌 포도송이


다음 마을인 Riego de Ambrós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그래도 이 마을은 성당이 열려 있고, 레스토랑도 운영 예정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인기척이 있는 거리에 오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잠시 머무를까 하는 유혹이 들긴 하지만, 여기서 멈췄다가는 목적지까지의 걸음이 몹시 고되리라는 강한 직감이 든다.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귀여움이 묻어난다
이제 산길을 따라가 보자
커다란 고목을 보니 수호목이 떠오른다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는 구름이라니!


다시 만난 파란 하늘이 반갑다. 쌀쌀함을 잊게 해주는 뜨거운 햇빛마저 고맙기만 하다. 비행운이 없는 깨끗한 푸른 도화지에 새하얀 구름이 그림을 그린다. 하늘을 향해 열렬한 삿대질을 하고 있는 구름이 무척 재미있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나올 법한 자태 아닌가! 저이는 무슨 사연으로 왜 신에게 분노한 걸까나.


저 멀리 보이는 저곳까지 가야 한다
각기 다른 형태로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차도와 인도


내리막이라 크게 힘들지 않으리라는 기대는 금세 산산조각 났다. 순례길 3일 차의 수비리가 떠오르는 극악한 각도와 험난한 바닥에 앓는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온다. 정말이지 어떤 순간에도 방심할 수 없는 길이라니까. 발목이 나가기 십상인 길이라는 것을 잦은 접질림 경험으로 알기에, 조심조심 발을 디딘다. 지난한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BPM이 빠른 신나는 음악을 반복 재생한다. 그 메들리 영상을 들으면 이날의 내리막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아주 많이.


몰리나세카 다리


언제나 그러하듯,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발을 재촉하고 독촉하여 드디어 목적지인 몰리나세카(Molinaseca)에 도달한다. 이제 로마 시대 다리는 큰 감흥이 없다. 거의 2시가 다 된 시간에 일단 식사부터 한다. 마을 초입의 레스토랑에서 시킨 순례자 메뉴를 거의 마시듯이 흡입했다.


놀랍지 않게도, 사진 한 장을 안 찍었다.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맥주를 노상에서 들이킨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길고양이들마저 나른하게 널브러져 낮잠을 자고 있다. 3층 높이의 큰 숙소에 우리만 묵는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주인장에게 바디랭귀지를 동원한 설명을 듣는다. 응접실과 부엌, 계단과 층계참의 디테일이 몽땅 기억나는데, 역시 사진 한 장이 없다. 묵직한 대문과 고풍스러운 열쇠까지 다 떠오르는데!


저녁식사는 푸짐하게
어마어마한 스테이크


휴식을 취한 뒤 시간 맞춰 저녁을 먹으러 나온다. 몰리나세카 다리 근처의 다른 식당에 들어간다. 하천 바로 옆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뷰 때문인지 가격대가 있는 편이지만, 고생이 많았던 특별한 날이니 아낌없이 돈을 쓰기로 한다. 아부지는 여기서 먹은 스테이크의 푸짐함과 맛을 아직까지 말씀하신다. 샐러드의 치즈는 많이 남기고 와서 아쉽다. 나는 뭘 먹었더라. 아마 생선 요리였을 거다.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냥이


길고양이가 유난히 많은 마을이다. 뭐라도 떨어질까 곁에서 어슬렁거리면서도 경계심은 의외로 높다. 치즈를 조금 떼어줘도 절대 직접 받아먹지 않는다. 다양한 색과 무늬의 여유로운 길냥이들에게서 평온함이 전해진다. 하천 건너편에는 잔디에 누워 선탠을 하는 한 여성과 물 안에서 장난을 치는 두 소년이 보인다. 다소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인데도 현지인은 아무렇지 않게 물놀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크지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몰리나세카


여기도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순례자들이 여럿 묵어가는 곳이고, 심지어 라면을 판다는 한글을 써붙인 알베르게도 있다. 설렁설렁 산책을 하다 보니 느지막하게 저무는 해가 보인다. 무척이나 길고 긴 하루였지만, 이전만큼 고달프지는 않다. 철의 십자가 아래 두고 온 만큼 비어버린 가슴이 헛헛하지도 않다. 다시 채워가야 할 공백은 허무보다 용기를 북돋는다. 시원스러운 미소로 새로울 내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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