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 | 다시 채우기 위해 비워내는 마음
시작.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
종료. 몰리나세카(Molinaseca)
해냄. 7시간 / 25.37km
감기 기운으로 이틀 정도 무거웠던 몸은, 비상약을 먹고 계속 잤더니 어느 정도 회복됐다. 고요하던 라바날의 골목길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포기해야 했으나,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쉼이었다. 캄캄한 마을을 빠져나와 차도 가장자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근처에 도보가 있긴 하지만, 어두운 새벽에 울퉁불퉁 흙길을 걷느라 체력을 소모하지 않기로 한다. Gronze 어플로 간간히 GPS를 확인해 가며 안전하게 걷는다.
1시간 반 정도를 걸어 폰세바돈(Foncebadón)에 도착한다. 카페에 들어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신발끈을 다시 질끈 동여맨다. 각자의 걸음으로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눈에 익은 얼굴의 여성 순례자는 여기서 일출을 보고 가겠다며 돌멩이 위에 털썩 앉은 채 빵을 베어문다. 친절한 미소를 지닌 현지인들의 아침 인사를 받으며 다시 발을 떼 본다.
폰세바돈에서 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길쭉한 십자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다. 성인 키의 3~4배 정도의 길이에, 한 품에 끌어안을 수 있을 둘레의 기둥이다. 가까이 가보니 다양한 물건들이 걸려 있다. 아래로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돌멩이들이 가득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들의 사진도 많고, 글자가 빼곡히 적힌 돌들도 있다.
순례자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가지고 온 돌멩이를 철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다. 누군가는 소원을, 누군가는 그리움을, 누군가는 걱정을, 누군가는 후회를, 누군가는 미안함을, 누군가는 미련을, 누군가는 슬픔을 담아서. 저마다 지니고 있던 짐을 훌훌 털어내듯 놓아버리는 곳이다. 이 길을 걸으며 차곡차곡 쌓아온 육체의 고통과 차분히 정리해 온 마음의 고민을, 작지만 단단한 철의 십자가 앞에 쏟아낸다.
우리 부녀도 한국에서부터 배낭에 매달고 다녔던 키링을 철의 십자가 기둥에 걸어본다. 진짜 돌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하게 생긴 아크릴로 갈음 가능하리라. 4주 가까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떠올리며 짧은 기도를 한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건강하고 무사하게 걸을 수 있기를.
손가락 두 마디 크기 물건 하나를 내려놓았을 뿐인데, 묘하게 기분이 홀가분하다. 여행 버킷리스트 최상단의 산티아고 순례길, 그 위에 서있음이 비로소 절절하게 실감 났기 때문일까. 이 길을 걷고 싶던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떠올려본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읽었던 수많은 순례길 여행기들, 사진과 영상으로 접한 이미지들. 타인의 경험과 시선으로 그려보던 이 길을, 나만의 시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중이라니!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기도를 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해 본다. 스쳐 지나갔던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잊고 지냈던 이들의 추억을 하나씩 끌어내본다. 생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길 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되짚어본다. 크고 작은 연이 닿았던 그들 모두의 평안과 일상 속 기쁨을 진심을 다해 빌어본다. 다른 이를 위하는 마음은 충만한 행복감으로 차오른다.
얼추 기도를 끝내니 새로운 풍경에 시선이 간다. 여행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씩씩하게 발을 움직인다. 청량한 푸른 색감의 하늘, 낮은 구름, 키가 작은 덤불 사이의 오솔길이 전부 새롭다. 핸드폰을 들어 끊임없이 박제하고 싶게 만드는 길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중앙의 길을 따라 걷는다. 짙은 안개가 푸른 하늘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사람은커녕 개미 하나 보이지 않는 살풍경함은 버려진 마을이라는 인상을 준다. 코로나 이후 순례길의 많은 마을들이 경제난을 피하지 못하고 버려졌다던데, 여기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아기자기하게 반짝였을 돌벽 건물들을 상상하며 옷깃을 여민다. 해가 없으니 쌀쌀하다.
다음 마을인 Riego de Ambrós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그래도 이 마을은 성당이 열려 있고, 레스토랑도 운영 예정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인기척이 있는 거리에 오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잠시 머무를까 하는 유혹이 들긴 하지만, 여기서 멈췄다가는 목적지까지의 걸음이 몹시 고되리라는 강한 직감이 든다.
다시 만난 파란 하늘이 반갑다. 쌀쌀함을 잊게 해주는 뜨거운 햇빛마저 고맙기만 하다. 비행운이 없는 깨끗한 푸른 도화지에 새하얀 구름이 그림을 그린다. 하늘을 향해 열렬한 삿대질을 하고 있는 구름이 무척 재미있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나올 법한 자태 아닌가! 저이는 무슨 사연으로 왜 신에게 분노한 걸까나.
내리막이라 크게 힘들지 않으리라는 기대는 금세 산산조각 났다. 순례길 3일 차의 수비리가 떠오르는 극악한 각도와 험난한 바닥에 앓는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온다. 정말이지 어떤 순간에도 방심할 수 없는 길이라니까. 발목이 나가기 십상인 길이라는 것을 잦은 접질림 경험으로 알기에, 조심조심 발을 디딘다. 지난한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BPM이 빠른 신나는 음악을 반복 재생한다. 그 메들리 영상을 들으면 이날의 내리막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아주 많이.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맥주를 노상에서 들이킨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길고양이들마저 나른하게 널브러져 낮잠을 자고 있다. 3층 높이의 큰 숙소에 우리만 묵는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주인장에게 바디랭귀지를 동원한 설명을 듣는다. 응접실과 부엌, 계단과 층계참의 디테일이 몽땅 기억나는데, 역시 사진 한 장이 없다. 묵직한 대문과 고풍스러운 열쇠까지 다 떠오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