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8~29 | 역시 여행의 묘미는 축제지
시작. 몰리나세카 (Molinaseca)
종료. 폰페라다 (Ponferrada)
도착.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Villafranca del Bierzo)
해냄. 2시간 반 / 7.97km
오늘은 대도시 폰페라다(Ponferrada)까지만 걷고, 거기서 버스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까지 이동하기로 한다. 걷는 대신 버스로 뛰어넘는다는 이런 결정을 종종 했는데, 이는 아부지의 사전 조사에 따른 '재미없는 길'이라는 판단에 근거한다. 볼거리가 없는 길이라는 뜻으로, 대개는 차도 바로 옆을 지나야 하는 순례길을 해당 분류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니 대도시의 진입로나 출로는 지양하게 됐다.
다만 오늘은 버스를 타기 위해 대도시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동네 산책이라고 생각하며 아스팔트로 포장된 인도를 가볍게 걷기 시작한다. 자동차가 많지 않기도 하고, 나름 탁 트인 전경이라서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인가는 마치 평창동이나 성북동 같은 부촌 별장 느낌이 난다. 유튜브 예능 영상 하나를 라디오처럼 귀로 흘려들으며, 북적이는 도심지를 향해 나아간다.
도시 중심의 광장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쎄요를 찍으러 성당에 가보았지만 문이 닫혀 있다. 인터넷으로 버스 예약이 되지 않아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없이 버스터미널로 직행한다. 매표소 직원은 발권 대신 시간 안내만 해준다. 돈은 버스 기사에게 직접 내면 된단다. 번화가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기다린다.
여행은 역시 기다림의 연속이다.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좁은 길을 달려 비야프랑카에 도착한다. 벌써 정오를 넘긴 시간에 해가 꽤나 뜨겁다. 알베르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서 배낭을 멘 채로 설렁설렁 동네 구경을 시작한다. 북적이는 동네 분위기가 묘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축제 기간이란다. 빌바오, 코바동가에 이어 벌써 세 번째로 만나는 지역 축제다.
일단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체크인을 하러 간다. 골목 잡화점에 크게 한글이 적혀 있어서 홀린 듯 들어갔더니 꽤나 다양한 컵라면에 심지어 김치까지 판매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을 찍은 마을이라는 점을 이제야 다시 떠올린다. 무려 나무젓가락까지 챙겨주는 인심에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넨다.
든든히 점심을 먹고 다시 마요르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 한 편의 극장(Teatro Villafranquino) 앞에 거대한 인형들이 줄지어 서있다. 매년 9월 14일에 열리는 'Christ of Hope' 축제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13일로, 딱 축제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축제의 메인은 내일이라는 의미에, 당연히 1박을 더 하기로 결정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동네인데,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기고 가야지.
인형의 탈을 쓴 사람들이 골목골목의 식당을 찾아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면, 식당에서는 음식과 음료를 내어준다. 빅헤드를 위시한 퍼레이드 행렬은 신나게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마무리를 한다. 어린아이들이 많이 참여하는 행사라서 더욱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축제 당일 오전에는 마을 전체에 커다란 대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오에는 미사가 열리고, 오후에는 빅헤드 행렬과 예수상이 마요르 광장을 지나 산 니콜라스 엘 레알 성당까지 행진을 한다. 행사가 끝나면 연주자들이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음악을 연주한다. 아주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멋진 지역 축제다.
이외에도 전야제와 당일 저녁에는 광장의 간이 무대에서 멋진 공연이 펼쳐진다. 한국인의 아리랑처럼,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 부르는 대중적인 노래가 많았다. 호소력 짙은 음악과 섹시한 플라멩코 춤이 공존하는 무대에 흠뻑 젖어 밤늦게까지 흥겹게 즐겼다. 그러다가 미리 고지받은 알베르게 잠금 시간이던 10시를 조금 넘기는 바람에 주인에게 한소리 들었다. 빡빡한 순례길이지만, 예외 없는 규칙의 필요성을 이해한다.
틈틈이 동네 구경도 한다. 넓지 않은 폭의 강 옆으로 조성된 깔끔한 산책로다. 아마도 스페인 하숙에서 조깅을 하던 바로 그 길이 아닐까. 다리 밑에서는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한갓진 얼굴로 크로켓을 치고 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광경에 절로 마음이 녹는다. 길고 긴 산티아고 순례길 위의 많고 많은 마을들 중에서 하필 이 마을을 촬영장소로 선택한 이유를, 오감으로 느껴본다.
마요르 광장을 지나쳐 조금 더 가면 엘러미더 공원(Jardín de La Alameda)이 나온다. 아이들이 탈 수 있는 이동식 놀이기구가 가득한데, 축제 기간에만 이런 거겠지. 그 옆에 커다란 산 니콜라스 엘 레알 성당이 있다. 축제 당일 정오 미사를 여기서 진행했다. 같은 건물에 호텔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건물 오른편의 골목으로 올라가면 스페인 하숙에서 운영했던 알베르게가 나온다. 해당 알베르게는 현재는 운영되고 있지 않다.
엘러미더 공원 옆쪽으로 가면 성당 하나가 또 나온다. 담백한 외관에 기대 없이 입장하는데, 다채로운 색감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특히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한 햇빛이 성당 기둥에 아른거리며 그려낸 빛깔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미완성의 성당에서 이토록 예쁜 찰나를 마주하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해서 더욱 반갑고 기뻤다. 이런 찰나들이 모여 반짝이는 추억을 완성시키는 것이리라.
평소 건축에 관심이 많은지라, 성당이건 집이건 건축물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순례길을 걷다 보니 스페인 주택들에는 상단 사진처럼 증축한 테라스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건축법 상 허가가 된 것일까 궁금했으나 알 도리가 없어 아쉽다. 또한 하단 사진처럼 무너뜨린 집의 단면도 자주 만났다. 마요르 광장에서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데, 안전 상 괜찮은 건가 싶더라. 벽면이 붉은 이유는 건축에 사용한 토양 때문이라고 한다.
크지 않은 마을에 대체 성당이 몇 개인지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들을 구경하며 포도밭이 있는 마을 위쪽으로 걸어본다. 순례길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으로, 걸어보지 않은 길이 새롭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성당이다. 피치 못할 이유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당도할 수 없는 순례자들의 경우, 이 문을 지나면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과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비야프랑카는 '작은 콤포스텔라'라고도 불린다.
나병 등 전염성이 있는 병을 지닌 순례자는 사람이 많은 도시에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있다. 마을 중심지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성당의 위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용서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50년 주기 희년에만 문이 열린다니, 용서받기 위해서는 꼼짝없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