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Villafranca del Bierzo) 종료. 라 파바 (La Faba) 해냄. 6시간 반 / 23.69km
즐거웠던 기억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이다. 산 밑에 위치한 비야프랑카부터는 다시 오르막이다. 오늘 묵을 마을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배낭은 등 뒤에 짊어진다. 다리를 건너 마을을 벗어나니 거짓말처럼 가로등이 뚝 끊긴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에 한층 어두침침한 새벽 도로를 손전등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걷는다.
평지를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산길의 스산함이 새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졸졸 흐르는 계곡 옆을 거슬러 오른다. 새카만 어둠을 뚫으며 운전하던 한국의 어느 국도가 떠오를 무렵, 산을 넘어가는 고가도로의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를 스친다. 이른 새벽부터 어디를 향해 저토록 빠르게 달리고 있는 걸까. 고속도로 양 옆으로 촘촘히 세워진 밝은 가로등이 우리 발 밑의 길도 밝혀준다.
흐리멍덩한 날씨
젖은 길 위를 젖은 몸으로 걸어서 도착한 첫 번째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다. 허기진 배와 지친 다리를 도닥이며 다음 마을까지 걷는다.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당도한 트라바델로(Trabadelo)에서 비로소 카페를 만난다. 시금치가 들어간 또띠아가 취향이 아니라 아쉽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불어넣는 온기에 힘이 난다. 어느새 카페를 가득 채운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산티아고까지 200km도 안남았다
산과 산을 잇는 고가도로
대형 트럭과 차량을 위한 주차장과 휴게소가 자주 나타난다. 차도 바로 옆에서 쌩쌩 달리는 차와 함께 걷자니 피로가 급속하게 쌓인다. 순례길 초반에 했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깔끔하게 깔린 도로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두 발로 걷는 의미와 이유는 무엇인가. 재미없다. 흙길 밟고 싶다.
슬슬 개는 하늘
마을들이 있는 방향으로 살짝 길이 틀어지니, 대형 차량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멀어진다. 어느새 맑아진 하늘에 우비와 가방을 정리하기로 한다. 암바스메스타스(Ambasmestas)의 카페에서 시원한 콜라를 들이켠다. 수비리에서 인연을 맺고 레온과 비야프랑카에서 다시 만난 아부지 친구와 길 위에서 재회한다. 전날 알러지로 탈이 나서 고생하셨다는데도 걸음이 무척 빠르시다.
아기자기한 마을들을 구경하며 한 시간 반 남짓을 걷다 보니 오늘의 목적지인 라스 헤레리아스(Las Herrerías)에 도착한다. 미리 봐둔 알베르게의 1층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숨을 고른다. 이 마을에서부터 다시 펼쳐진다는 가파른 산길은 내일의 나에게 미룰 생각이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부지 친구분은 당연히 함께 더 걸으리라 생각하고 계신다. 아부지도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으신 눈치다. 그만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봐도 크게 먹히지 않는다. 시간도 애매하고 핑곗거리도 없으니 무거운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킬 수밖에.
본격적인 산길
살짝 섞였던 짜증은 마을을 벗어나며 시작되는 본격적인 산길에 스르르 사라진다. 배낭의 무게에 등과 어깨가 아프긴 하지만, 신선한 공기와 촉감 좋은 흙길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토록 단순한 스스로가 웃기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는 뜻일 터이니.
비로 축축해진 진흙과 비로 풀어진 소똥이 뒤섞인 함정이 곳곳에 숨죽이고 있다. 하지만 산이 가득한 대한민국 출신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산행을 이어간다. 경사가 가팔라질수록 호흡은 가빠지고 발걸음은 경쾌해지는 기적을 행한다. 여행 초반에 비해 확연히 좋아진 체력을 느끼며 금세 찐_최종 목적지에 당도한다.
공립 알베르게 마당의 순례자 동상
패키지여행으로 오신 아부지 친구분을 따라 라 파바(La Faba)의 공립 알베르게로 향한다. 항공과 숙박, 그리고 모든 구간의 동키 서비스를 제공하는 순례길 여행 패키지는 약 650만 원 정도 한다고. 혼자 걷기 부담스럽거나 가벼운 몸으로 순례길을 완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고려해 볼 만한 선택지가 아닐까 싶다.
다소 고급진 라면 요리
체크인이 늦어진다고 하여 라 파바의 유일한 바에 점심을 먹으러 간다. 무려 라면을 파는 곳이라는 정보는 우리보다 며칠 앞서 걷고 있는 아부지의 다른 친구분께 들었다. 국물이 많은 라면이 아니라, 다양한 채소를 곁들인 요리가 나왔다. 신라면의 매콤함이 지친 몸을 감싸 안는다. 너무 맛있어서 저녁에 또 오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간택인가요
라면과 맥주로 든든히 채운 배를 두드리며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길냥이가 내 배낭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대로 줍줍하여 한국까지 모셔오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공립 알베르게 근처를 맴도는 녀석이라며, 직원이 방문을 절대 열어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패키지의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체크인을 한다. 경험 많은 그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듣는다. 체크인을 도와주는 독일 출신 남성 관리인도 여러 조언을 건넨다. 아부지와 둘이 함께 걷고 있다는 나의 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어느 길이 좋은지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순례길을 향한 사랑으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투덜거림 가득한 내 모습을 조금 반성하게 된다.
샤워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린다. 패키지 여행객들의 한국어로 가득한 방의 소음이 괜스레 어색하다. 한국에서 챙겨간 비상약 중 알러지 약과 모기약을 나눔한다. 이역만리 타지까지 와서 다들 고생이 많다.
이 찰나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저녁을 먹으러 다시 Tito 바를 찾는다. 라면과 함께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킨다. 행복감에 젖은 부녀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이 텃밭에서 바로 따온 파프리카와 고추가 달콤하고 신선하다. 거한 저녁을 마친 우리에게 후식주가 건네진다. 포블라시온의 숙소에서 마신 이후 처음이다. 너무 맛있다. 마지막까지 완벽한 저녁이다.
만약 처음 계획했던 마을에 멈췄더라면, 라 파바는 그냥 지나쳤으리라. 아부지의 인연 때문에 힘듦을 참고 조금 더 걸었고, 그래서 이 멋진 마을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자주 입에 올려 추억을 되새길 정도로 만족스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