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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드디어 나만의 까미노를

D+31 | 행복 속에서 찾아낸 달콤한 행운

by 누비
시작. 라 파바 (La Faba)
종료. 폰프리아 (Fonfria)
도착. 사리아 (Sarria)
해냄. 5시간 반 / 16.44km



비가 쏟아져서 출발이 늦어진다. 날씨 어플을 믿고 잠시 기다리니 빗방울이 잦아든다. 어느새 정이 든 알베르게의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데, 아예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 단 하루만 묵고 떠나는 순례자들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일방적인 아쉬움을 삼키며 방수 커버를 씌운 배낭을 단단히 멘다. 오늘도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야 한다.


비구름으로 뿌옇게 흐린 순례길


가랑비를 맞으며 가파른 오르막을 걷는다. 미리 예약을 하면 말을 타고 이 구역을 오를 수 있다는 얘기를 어제 알베르게에서 들었다. 그렇다면 길을 진창으로 만든 똥들의 출처는 소가 아닌 말이었던 걸까. 비로 미끄러운 돌멩이까지 조심하느라 속도가 더디다. 그래도 습도 높은 공기가 시원하고 상쾌하다.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라 라구나(La Laguna)에 도착한다. 유일하게 열려있는 카페에서 커피와 또띠아로 아침 식사를 한다. 주인장이 다가와 어제 라 파바에서 묵었냐며, 몇 명이나 알베르게에 숙박했느냐 질문한다. 아침 장사를 위해 미리 파악을 해놓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순례길 위의 작은 마을은 언제나 순례자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산등성이 사이사이 가득 피어난 구름


구름이 지나가 푸른 하늘이 보이는 찰나, 탁 트인 전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육안으로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이동하는 구름이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멈춰서 순간을 만끽해 본다. 행복하다.


익숙해진 표지판과 표지석


산티아고 프랑스길의 절반 정도가 카스틸라 이 레온(Castilla y León)의 행정구역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표지판과 표지석에 기재된 이 지역명을 가장 자주 만난다는 의미다. "Castilla y"를 벅벅 지워버린 흔적과 검열 부분 주변에 복원한 단어도 수없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분리와 통합 사이 현재진행형의 지역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부터는 갈리시아


드디어 카스틸라 이 레온의 끄트머리에 당도했다. 여기부터 갈리시아 지역이라 고지하는 경계석은 사람 키만 하다. 지나가던 남성 순례자 두 명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경계석을 기준으로 여기는 레온이고 저기는 갈리시아라고 설명하며 엄지를 치켜들고 먼저 떠난다.


길을 나선 지 어언 한 달, 어느새 여정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 길의 끝에 뭐가 있을까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아


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구름 속을 걷는다. 직 우리뿐인 길은 차박차박 발을 옮기는 우리의 발걸음 소리 외에는 고요하다. 그러나 자연의 온갖 소리들로 사위는 평온하게 소란스럽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스치고 덤불을 흔든다.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에서 진동이 퍼져나간다. 축축한 풀 위를 느릿하게 기어가는 달팽이의 흔적이 옅은 자국을 남긴다. 인간의 존재감이 보잘것 없어지는 자연 속에서, 나의 번뇌와 고민과 걱정은 한없이 희미해진다.



돌담 사잇길로 걷다 보니 이내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 세브로이(O Cebreiro)다. 마을 전체가 짙게 깔린 구름으로 자욱하다. 고작 한 치 앞까지만 가까스로 시야에 잡힐 정도다. 높은 고도로 낮아진 기온과 구름으로 높아진 습도가 전신을 서늘하게 휘감는다. 독특한 형태의 지붕과 담벼락의 건물들이 인상적인데,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핸드폰을 열고 사진을 찍을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몽환적인 흐릿함에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세상 끝 마을에 뚝 떨어진 기분이다.


순례길 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라는 산타 마리아 성당(Santuario de Santa María a Real do Cebreiro) 때문인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 여행객이 꽤나 보인다.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북적임을 뚫고, 우리도 성당에 들어선다. 쎄요를 찍고 초 하나에 불도 붙이며, 모두의 평안과 평화를 빌어본다.


산티아고까지 이제 150km 남짓


오 세브로이까지의 순례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바로 이 길을 걷기 위해 까미노에 왔다고. 지금껏 걸어온 짧지 않은 길을 하나씩 곱씹어봐도, 지금 이 길만큼 마음을 사로잡은 길은 없었다. 아니다. 앞선 모든 길들을 직접 두 다리로 걸으며 올곧게 마주했기에, 비로소 당도한 축축하고 고요한 산길을 오롯이 만끽하며 안정감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어깨를 짓누르는 짐도, 발바닥을 저릿하게 만드는 육체도, 일순 잊는다. 그저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고양감. 까미노를 걸으며 처음 느끼는, 하지만 까미노를 고대하며 상상했던 바로 그, 자유. 짧은 해방감으로 고취되는 감정이 애틋하고 짜릿하다. 바로 이 찰나를 위해서, 나는 스스로 순례자가 되기를 선택했구나.


전나무 숲길을 산책하듯 걷기


마을에 들어설 때보다는 경사가 덜하지만, 여전히 길은 산 중이다. 길쭉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자니 한국의 여러 둘레길이 떠오른다. 익숙함을 누리며 무거운 다리를 가벼운 마음으로 독려한다. 고즈넉한 산길의 멋들어진 분위기에 아부지의 얼굴 가득 미소가 만연하다.


데일밴드가 붙어있던 순례자 동상의 발


어느 순간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진다. 온몸으로 바람을 마주하며 모자를 벗고 있는 거대한 순례자 동상. 순레자들은 그 앞에 멈춰서 그가 응시하는 산등성이를 라본다. 세찬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순례자의 발 이곳저곳 곱게 붙어있는 데일밴드, 그 속에 담긴 누군가들의 마음이 사랑스럽다.


동화책 삽화같은 길
탁 트인 시야


제주도 오름 같은 산들이 가득한 갈리시아 산맥을 계속 걸어 나간다. 애초 계획은 오 세브로이에서 버스를 타는 것이었으나, 애매한 버스 시간 때문에 계속 걷기로 했다. 두 시간 정도 걸어 다음 마을인 오스피탈(Hospital da Condesa)에 도착한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작은 바에서 간단히 허기를 달랬는데도, 시간이 또 어중간하다.


어쩔 수 없다.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고, 배낭을 등에 메는 수밖에. 조금 더, 조금만 더 걸어서 다음 마을까지만.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작은 행운이 찾아듭니다


오늘은 유난히 클로버가 많다. 걸으면서 틈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클로버 밭을 빠르게 훑는다. 행복을 뜻하는 세잎클로버들의 향연 속에, 문득 잎이 네 개인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눈에 띈다. 몇 걸음 더 옮기기도 전에 네잎 하나를 또 발견한다.


행복으로 가득한 길 위에서 기어코 찾아낸 행운.


노란 화살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나가자


1시간 반 남짓을 걸어 폰프리아(Fonfria)까지 당도한다. 중간중간 마을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지나가는 주민 하나 없이 침잠해 있다. 모두가 떠나 죽어버린 마을처럼. 그래도 둘이 함께 걷고 있기에 쓸쓸하거나 외롭지는 않다. 집에서 직접 닭을 잡아 한 솥 가득 육'계'장을 끓였다던 아부지의 생생한 어린 시절 경험담이 아직도 귓가를 울린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창문 너머
갈리시아 지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모여드는 여러 순례길이 그려진 갈리시아 지도가 레스토랑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오늘 걸어온 길을 보니, 새삼 스페인이 거대한 크기로 다가온다. 계획보다 멀리 걸어온 바람에 허기진데, 주문한 버거에 고기 누린내가 나서 조금 속상하다. 구글맵으로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여유를 가져본다.


사모스(Samos)


폰프리아에는 1시 40분에 도착했는데, 두 시간이 지난 3시 40분에야 버스를 탄다.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여럿 함께다. 어제 라 파바의 알베르게 주인장이 추천했던 사모스를 지나친다. 오늘 우리의 종착지는, 사리아(Sarria)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성당


순례길 증명서는 최소 100km를 걸어야 발급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과 여력이 부족한 어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로부터 100km가 조금 넘게 떨어진 사리아부터 걷기 시작한다고. 그래서인지 사리아 시내는 유난히 많은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생장처럼 순례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 가게도 많고, 순례자 메뉴를 파는 레스토랑도 모여있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공용 샤워실에서 오늘치의 땀과 피로를 녹여낸 뒤, 우리도 시내로 나섰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젊은 층들은 서로를 향해 한껏 반가움을 표한다. 나이 지긋한 부부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좁은 길목을 다정히 걷는다. 야외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순례자 메뉴를 주문한 나와 아부지도 하우스 와인을 잔에 따르고 오늘의 노고를 서로 치하하며 건배한다.


야외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소화를 시킬 겸 천천히 산책을 하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들린다. 홀린 듯 소리를 따라 걷다가 등나무 밑을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작은 무대에서는 공연이 한창이고, 그 앞의 야외 테이블에도 사람이 꽤 앉아 있다. 바로 맥주를 주문해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저녁 8시 반인데도 여즉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에서 즐기는 도심 속 야외 공연이라니. 비록 가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음악이라는 언어로 전달되는 다채로운 감정들에 푹 빠져든다.


반짝이는 조명으로 빛나던 저녁


마지막까지 눈부시게 완벽한 하루. 이 길을 시작한 이래 항상 머릿속을 맴돌던 수많은 고민과 의문과 걱정들이 단숨에 녹아내린 날. 이 하루에 도달하기 위해 걷고 견디고 참아냈던 지난 한 달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단숨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노라고, 인생은 차곡차곡 쌓아온 하루들로 채워지는 것이라고.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뒤에야 나만의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모아둔 행복들이 마침내 행운처럼 벅찬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드디어 나는 이 길 위에 오롯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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