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 끝을 앞두었으니 곁길로 빠져보자

D+32 | 우리만의 순례길을 만들고 싶어서

by 누비
출발. 사리아 (Sarria)
도착. 루고 (Lugo)


종착지가 거의 보이는 만큼, 마지막으로 샛길에 빠져보기로 한다. 사리아에서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달리니 금세 루고(Lugo)에 도착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리미티보길(Camino Primitivo) 위에 있는 큰 도시다. 중심지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독특한 도시이기도 하다.


루고 성곽


이 로마시대 성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두툼하고 높은 벽의 견고함이 감탄을 자아낸다. 아치 모양의 성문들도 저마다의 개성이 담겨 있어 아름답다. 성문을 들어서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 좁은 골목을 걷게 된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이 길을 찍어둔 사진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산티아고까지 99km
고생한다, 우리 등산화


순례길 위의 도시답게, 조개가 그려진 표지석과 바닥의 노란 화살표가 눈에 잘 띈다. 루고 대성당을 거쳐야 하는 순례길이 성곽 안쪽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순례길 좌우로 순례자 대상 가게들이 여럿이다. 대성당과 성곽, 조개 이미지를 담아낸 루고의 도시 그래픽이 무척 매력적이다.


루고 대성당 (Catedral de Lugo)
루고 대성당 앞쪽
섬세한 인물상이 많은 루고 대성당 외관


대성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척 거대하다. 성당 정면의 정석적인 좌우 대칭은 담백하면서도 위용이 넘친다. 후면은 원통형의 듬직한 건물과 다채로운 곡선들이 무척 독특하고 아름답다. 성당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한세월이다.


내부도 무척 화려함
황금빛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


일요일 10시라는 타이밍 덕분에 루고 대성당의 예배를 참관한다. 웅장한 내부를 가득 채우며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외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현지인들은 자연스럽게 일상을 이어나간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루틴이 당연한 삶에는 특유의 안정감이 묻어난다. 신부와 동시에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신도들의 목소리에 평온함이 담겨있다.


철창 너머의 예수


화려한 색감과 부조로 가득한 성당이건만, 의외로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건 앙의 예배당이 아니다. 구에서 예배당까지 이어지는 복도의 오른편에 반대쪽 복도와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그 안에 동굴처럼 뚫려있는 공간이 있다.장의 부조와 벽면의 그림도 독특하지만, 쇠사슬로 칭칭 잠긴 철창 너머에 예수상이 위치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철창 앞에는 싱싱한 생화가 꽂혀있다. 고요한 정적에서 종교 특유의 경건함이 묻어난다.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적은 돈이나마 헌금을 내고 왔다.


우리만의 느긋한 순례길


예배를 다 보지 않고 성당을 나선다. 성당 앞의 박물관에 가볼까 했지만, 아직 열기 전이다. 대신 성곽 위로 올라가 본다. 고운 모래가 깔린 산책로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가볍게 산책하는 이들도 많지만, 팔에 밴드를 두르고 조깅을 뛰고 있는 이도 여럿이다. 우리도 순례길을 걷듯 힘을 주고 걷는 대신, 천천히 도시를 음미하며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평온한 일요일 오전의 일상에 녹아든다.


성곽 바깥을 에둘러 차도가 있다
독특한 형태의 지붕과 건물 뼈대


성곽을 기준으로 형성된 도시라서 사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성곽 외부의 건물들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지만, 성곽 내부의 건물들에는 역사가 묻어난다. 뼈대만 남긴 채 무너져있는 건물도 꽤 있고, 중간중간 성곽에서 내려갈 수 있는 계단들도 막혀있는 곳이 많다.


성곽을 바라보며 맛난 브런치


성곽을 걷다가 귀여운 야외 정원을 발견한다. 구글맵으로 확인해 보니 평점 높은 브런치 카페다. 냉큼 내려와 가게를 찾아 들어선다. 성곽이 보이는 양지의 좌석이 타이밍 좋게 비워진다. 테이블 위의 QR을 찍어 메뉴판을 확인하고 주문한다. 커피는 살짝 아쉽지만 브런치가 무척이나 맛있다. 스스로의 관찰력에 뿌듯해하며, 여유롭게 현지인 사이에 섞여든다. 한국의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느긋함을 누린다.


조금은 섬뜩한 손 조형물


배도 채웠으니 다시 도시를 구경해 본다. 휴일이라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문득 꽤 큰 정원이 있어 들어서보니 박물관에 딸려있는 후원이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특이한 조형물들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후원을 나와 조금 더 걸으니 박물관(Museo Provincial de Lugo)의 정문이 나타난다. 입장료는 무료. 친절한 직원의 설명을 듣고 전시관으로 들어선다.


로마 조형물 전시관
아직도 남아있는 로마의 타일 모자이크
다채로운 형태의 종교 전시물
크고 높은 지붕이 독특한 전통 가옥


수천 년 전 부흥했던 로마는 옅은 흔적으로나마 잔존하여 여전히 후세의 감탄을 자아낸다. 멀리 떨어진 스페인의 북부 지역까지 영향을 남겼다는 점도 새삼 놀랍고. 이외에도 종교적인 전시물과 지역색이 드러나는 조형물도 흥미롭다.


색과 질감이 너무 예뻤던 그림 일부
곧 두 눈으로 담게 될 풍경


회화가 전시된 관도 여럿이다. 특정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가득한 방도 있고, 하나의 주제로 작품을 모아둔 방도 있다. 우리 여정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그린 드로잉 앞에 서니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린다. 이틀만 지나면 바로 이 광경을 내 두 눈에 직접 담을 수 있구나!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질주야 (핏.벤허


한 시간 넘도록 즐겁게 관람한 박물관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산이 없으니 바람막이의 모자를 뒤집어쓴다. 불과 몇 시간 전, 부산스럽게 광장에 깔리던 벼룩시장은 비 때문인지 이미 철수하고 텅 비었다. 성곽 바깥에 위치한 기차역 근처 일식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해외에 한식당이 일식당만큼 많아지는 날이, 머지않은 미래에 도래하지 않을까.


아침에 배낭만 먼저 맡겨둔 호텔에 돌아가 체크인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점심 전까지 바쁘게 움직이고 오후에 쉬는 것이 순례자 특유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허기를 느끼고 5시 반쯤 거리로 나서보지만, 역시 스페인의 저녁 시간이 되려면 멀었다. 도심지를 걷다가 초콜릿 가게에 들어선다. 달콤한 향과 사랑스러운 모양에 홀린 듯 카드를 내민다. 남아있는 길 위에서 힘이 되리라.


입에서 녹는 문어 튀김
호화스런 가리비 요리


거금을 들여 해산물 요리를 먹는다. 와인도 간만에 화이트다. 입은 행복했으나 배는 만족하지 못하여 근처 다른 일식집을 또 찾는다. 현지인에게 인기가 많은 스시 바여서, 다른 이의 예약 시간 전까지라는 시간제한이 걸린다. 거한 두 번째 저녁식사까지 마치니 오늘의 엥겔지수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이제야 온몸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 아쉽다. 결국 호텔의 루프탑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더 한다. 아부지는 사리아부터 산티아고까지의 길이 많이 관광지화 되었다니 굳이 걷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신다. 하지만 산티아고에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건 너무 멋이 없지 않은가! 하루를 더 들여 산티아고에 걸어 들어가는 일정을 짜본다. 지금까지의 길을 곱씹다 보니, 앞으로 남아있는 길이 기대된다.


한 달을 붙어 지냈더니 생각의 흐름과 결심이 아주 비슷해졌다. 서로의 머릿속에서 그만 나가라고 농담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껏 함께 걸어온 우리만의 순례길에 마음이 벅차다. 종결을 앞두고 곁길로 빠져 최종적인 재정비를 하길 참 잘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4 드디어 나만의 까미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