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6 다가온 끝에 가벼워진 걸음

D+33 | 코앞으로 다가온 마지막에 들뜨는 마음

by 누비
출발. 루고(Lugo)
시작. 멜리데(Melide)
종료. 아주아(Arzua)
도착. 라바꼴랴(A Lavacolla)
해냄. 4시간 / 15.28km



원래의 길로 돌아갈 시간이다. 어젯밤 맥주를 마신 호텔의 루프탑에서 무난한 조식을 먹는다. 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루고의 성벽을 따라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조금 지연은 됐지만, 버스는 무사히 루고를 떠난다. 1시간 남짓을 달려 뽈뽀라는 이름의 문어 요리로 유명한 멜리데(Melide)에 도착한다. 아쉽지만,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에 식사는 패스한다.


불과 52km 남았다
담벼락 옆 좁은 도로의 운치


커피 한 잔으로 기운을 돋우고 걸음을 시작한다. 똑똑 떨어지던 빗방울이 다행히 사그라들고 있다. 차도 사람도 많아 북적이던 중심가만 벗어나니 금세 고요해진다. 하루의 쉼으로 가뿐해진 다리를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이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어느 집의 곡식 창고


이 지역은 집집마다 마당이나 뒤편 정원에 이렇게 생긴 곡식 창고가 있다. 공기가 잘 통할 수 있도록 틈새가 있고, 동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다리가 있는 형태다.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하나 모양은 가지각색이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더라.


그림자 하트


적당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사방의 나무와 수풀 덕에 청량하기까지 한 공기가 기분을 들뜨게 한다. 무거운 배낭도 아직은 견딜만하고, 발바닥도 그리 피곤하지 않다. 이 순간의 감촉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셀카도 찍고 그림자놀이도 하면서, 아부지와 함께 오붓한 찰나를 기록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
징검다리도 건너고
담쟁이와 이끼로 뒤덮인 숲도 지나고
서로를 찍는 서로를 기록하기


한국인에게 익숙한 산길이자 우리가 무척 좋아하는 숲길이어서 즐겁다. 생장에서 걸음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순례길 위에서 이토록 환한 미소를 걸으리란 상상은 못 했는데. 전혀 변하지 않은 줄 알았건만 꽤나 변해버린 스스로를 새삼스레 인지한다. 지금껏 걸어온 길을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걷게 될까. 헉, 설마 내가 지금 순례길을 다시 걷는다는 가정을 해본 건가? 진심??


걷는 내내 함께 한 염주


한국에서 챙겨간 염주 하나를 여행 내내 차고 다녔다. 산티아고에 두고 올 생각이었는데, 가지고 다니다 보니 정이 들어 한국에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 손목에 걸었다. 소중한 여행길에 동행해 준 감사함과 애틋함을 담아, 마지막 길에서야 사진으로 박제해 본다. 비록 초점은 나갔지만.


9월에 만나는 수국이라니
외따로이 서있는 나무
방향을 잃을 리 없는 이 길


중간중간 작은 마을이 있지만, 탄력을 받은 걸음의 속도는 쉽게 낮춰지지 않는다. 차도와 자동차를 만날 일이 별로 없는 오늘의 길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서쪽을 향해 올곧게 걷는 방향성은 동일하지만, 끝없이 평지가 펼쳐졌던 메세타 평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르락내리락 언덕을 넘나드는 길이 이전만큼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산에 자주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날씨를 핑계로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계속계속 이어지는 길


물론 '덜' 힘들다는 거지 '안' 힘들다는 건 아님. 빠르게 흐르는 구름이 해를 가렸다 말았다 하는 바람에, 정오 무렵에는 더위로 온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사진은 숲길 위주로 찍었지만, 그늘막이 없는 길도 꽤 길어서 걷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길가의 한 카페에서 다른 순례자들 사이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콜라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화장실이 거의 유료로 운영되는 유럽이지만, 순례길에서는 대부분의 가게에서 뭐든 구매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가끔 팁 박스가 놓여있는 화장실도 있긴 하다.


호리병을 매단 지팡이를 든 순례자 캐릭터
익숙한 한국어가 반갑다
COREA로부터 무려 1만 킬로!


드디어 아주아(Arzua)에 도착한다. 시멘트 도로와 차가 기껍게 느껴지다니. 내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은 라바꼴랴(A Lavacolla)에 묵기로 한다. 거기까지 걷기는 어려우니, 아주아에서 버스를 타고 라바꼴랴까지 이동하는 일정을 계획했다. 구글맵의 길 찾기로 확인한 버스 시간은 거의 2시간이 남았다. 오후 2시 반에 가까운 시간이라서 그런지, 도시가 무척 고요하다. 식사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조금 헤매다가, 결국 정류장 근처의 바에 앉는다. 버스는 20분이나 지연 도착한다.


산티아고까지 고작 10km


무사히 라바꼴랴에 도착하여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한다. 애매한 거리 때문인지 이 마을에 묵는 순례자는 그리 많지 않다. 코인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고, 짐을 배낭에 다시 차곡차곡 넣는다. 이제 알베르게와 2층 침대도 안녕이구나. 특히, 주로 파란색 매트리스가 깔려 있던 공립 알베르게는 지긋지긋하게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친근하고 다정한 인연도 만들어줬다. 역시 지나면 다 추억이라니깐. 수많은 후기들 덕분에 배드버그가 없는 쾌적한 숙소를 골라 다닐 수 있던 것도 감사하다. 순례길에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는데 말이다.


마지막 날을 앞둔 마지막 밤을 조용히 보낸다. 매일 같이 마셨던 술도 마다하고, 내일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 서는 순간, 과연 어떤 감정이 차오를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5 끝을 앞두었으니 곁길로 빠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