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라바꼴랴(A Lavacolla)
종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해냄. 3시간 반 / 11.54km
드디어, 마침내, 기어코, 마지막 날이 밝았다. 10km 남짓만 걸으면 되므로, 정오 전에는 도착하는 일정이다. 산티아고에 있다는 한식집에 카톡을 보내 점심 예약도 요청해 둔다. 여러모로 설레는 하루의 시작이다.
안개 자욱한 새벽길
뿌연 시야 속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붕붕
자욱한 새벽안개로 습도가 높다. 그래도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 위안한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걷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순례자들은 각자의 속도로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왔는데도 사위는 여전히 짙은 안개로 흐릿하다. 쨍한 날씨와는 전혀 다른 운치를 즐기며 나아간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고작 한 자릿수!
익숙한 이미지가 반갑기 그지없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직전 마을인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에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바로 여기 제주도 올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이 맺은 협약의 상징물이 있다. 일만 킬로 떨어진 산티아고 순례길에, 무려 돌하르방이라니! 여기 순례길에는 2022년에 설치되었다고 하고, 제주 올레에서는 2023년에 제막식을 진행했다고 한다. 양측의 길을 각각 100km 이상 걸은 사람에게 '공동완주인증서'를 발급해 준다고. 조만간 제주에 방문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산티아고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순례자상
공원이 워낙 넓은 데다가 안개도 짙어서 헤매고 있는데, 산책 중이던 현지인이 손으로 저쪽을 가리키며 맞게 찾아왔다는 제스처를 한다. 감사 인사를 하고 조금 더 걸어보니, 이내 언덕 위의 순례자상(Monumento ao camiñante)이 흐릿하게 보인다. 여기서 산티아고가 보인다던데, 한 치 앞도 흐리멍덩한 오늘은 그저 뿌옇다. 그래도 산티아고가 시야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한다.
맑은 날에는 여기서 산티아고가 보인다고
여기서 멋진 인연도 다시 만난다. 순례길 첫날 묵었던 보르도 산장에서 만난 미국인 랄프다. "당신들의 가방은 너무 무겁다"는 명언을 남긴, 바로 그 경력직 순례자다. (참고) 서로를 알아본 우리는 무척 반가워하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각기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걸어왔지만, 결국 목적지 바로 앞에서 재회한 것이다. 시작과 끝에서 만났으나 그 중간의 과정만큼은 현저히 다르다는 점도 이 길의 매력이리라.
너무나도 익숙한 돌하르방과 간세
생각보다 상세하게 기재된 소개글
이역만리에서 맞닥뜨리는 정겹고 익숙한 나의 문화가 얼마나 애틋하게 느껴지던지. 체계적으로 조성 및 관리되고 있는 제주 올레길에 대한 자부심도 생긴다. 역사가 깊은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휴를 맺을 정도였다니. 코로나 이후 많이 주춤거리는 추세지만, 이전 명성을 다시 찾을 수 있게 정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안전 관리에 힘써주길 바란다. 올레길이 유명해진 덕에 다른 지역의 여러 길들도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일 터다.
유스호스텔 같은 건물들도 지나고 독특한 조형물로 외부 정원을 꾸며둔 마을도 지나니 슬슬 차도가 넓어지기 시작한다. 대도시의 입구에 근접했다는 뜻이다. 수십 걸음을 더 걸어야 하는 로터리의 횡단보도도, 특이하게 생긴 고가도로도 전혀 힘들지 않다.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이름
차도의 도시 표지판도 무지개 빛깔이다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입성이다!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아닌, 표지판 그 자체에 적혀있는 저 이름이 어찌나 반가운지. 하지만 최_최종 목적지인 성당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한다. 걷다 보니 가게에 있던 몇몇이 도착을 축하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우리처럼 마지막 힘을 내고 있는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오래된 유럽 도시 특유의 울퉁불퉁한 돌길도 그저 달갑기만 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
좁은 골목을 걷다 계단을 내려가 아치형의 문을 통과하자 탁 트인 광장이 나온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니 거대한 대성당이 웅장하게 서있다. 드디어, 도착이다. 정말로, 내가 해내고야 말았다. 크고 묵직한 숨을 길게 내뱉는다. 벅찬 기분에 휩싸인 얼굴이 저절로 환해진다. 이 먼 길을 함께 한 아부지를 향해 돌아선다. 나보다 더 행복하고 기쁜 표정으로 마주 보는 아부지의 웃음에 고양감이 치솟는다.
우리는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해낸 자의 당당한 뒷모습
내가 해냄!!!!!!!!!!!
감격과 감동이라는 무형의 감정을 만끽했으니, 이제는 유형의 증거물을 남길 시간이다. 광장에 자리를 잡고 다양한 포즈로 인증샷을 찍어본다. 함박웃음을 걸은 채 연신 사진을 찍는 우리 곁으로 속속 다른 순례자들이 당도한다. 순례자들의 인증샷을 몇 장이나 대신 찍어줬는지 셀 수가 없다. 물론 우리 부녀의 사진도 남겨본다. 뿌듯함과 만족감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북적이는 광장에 앉아
신나고 시원하다!!! 해방이다!!!!
한참을 그렇게 광장에 서있자니, 아치문을 통과해 새로 들어오는 순례자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기분을 오롯이 누리는 그 얼굴들. 누군가는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토해내고, 누군가는 환희에 찬 함성을 지르며, 누군가는 길 위에서 만났던 이들과의 재회에 기뻐한다. 광장 한구석에는 바닥에 철퍽 앉아 하염없이 성당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다. 노트에 빼곡히 글로 감상을 남기는 이도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다.
바로 여기서, 순례자들은 자신만의 순례길을 완성하는 것이다.
고생했다, 우리의 운동화와 배낭!
감격을 끌어안은 채, 완주증을 발급받기 위해 순례자 사무소로 향한다. 생장에서부터 소중히 지니고 다니며 도장을 찍은 순례자 여권이 반드시 필요하다. QR로 연결되는 링크에 기본적인 내용을 온라인으로 입력한 뒤, 대기표 순서대로 창구에서 심사를 받는다. 도착일만 기재된 증명서는 발급받기 어렵지 않으나, 779km라는 거리가 적힌 완주 증명서는 꽤나 까다롭다. 나에게 배정된 담당자는, 순례자 여권에 찍힌 도장과 날짜를 아주 꼼꼼하게 확인했다.
순례자 증명서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완주 증명서
779km를 빠짐없이 전부 걷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장에서 출발하여 34일 만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당도했다. 잠시 샛길로 빠져 프랑스길이 아닌 순례길의 도시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여러 지방의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재미없거나 지루한 길은 버스를 타고 뛰어넘었다. 때로는 무리해서 많이 걸었고 때로는 체력과 일정을 고려하여 조금만 걸었다. 정답이 있는 길이 아니므로 우리만의 정답을 차근차근 채워나가는 여정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이 길을 오로지 두 다리로만 완벽히 걷는 것이 아니었다. 길고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이 길 위를 직접 걸으며, 존재의 이유와 걸음의 목적을 사유했다. 왜 사람들이 이 길을 사랑하는지, 왜 이 길이 오래도록 남아있을 수 있는지, 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길을 동경하고 있는지. 수많은 질문들과 나름대로의 대답들이 매일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왜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서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순례자 여권
순례자 여권
순례자 여권
아쉽게도, 명확한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지금까지의 삶과 현재의 일상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깊이 고민하리라 막연히 기대했건만, 막상 걸어보니 그런 여유는 사치였다. 과거를 돌이켜 곱씹다가도, 현재진행형의 육체적 괴로움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고통스런 걸음을 끝낸 뒤 시원한 맥주나 달콤한 와인으로 피로를 푸는 일과에 점차 적응할 무렵,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찰나를 겪었다. 수많은 번뇌에서 일순 자유로워져 지금 이 순간을 고스란히 즐기는 경지를 경험해 보았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온전히 마주하는 몸과 마음의 근육을 얻었다.
어느새 맑게 갠 푸르른 하늘
살다 보면 끔찍이 지치고 지독히 힘겨운 날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마다 나는 분명 이 길을 떠올리게 되리라. 뜨거운 여름의 끝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걸었던 이 길을. 하루하루를 충만히 채워낸 한 걸음 한 걸음을.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들을. 견디고 참고 애쓰며 키워낸 심신의 근력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하루를 견뎌낼 힘을 건네줄 터다.
드디어, 마침내, 기어코, 우리는 무사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