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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이 길을 걷기로 한 스스로를 용서하며

D+5 | 이역만리 타지에서 업보 절감하기

by 누비
시작. 팜플로나(Pamplona)
종료.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해냄. 6시간 반 / 23.07km



무거운 배낭을 호텔 로비에 두고 가볍게 길을 나섰다. 지난 며칠간 어깨를 짓누르던 9kg이 사라지니 발걸음이 어찌나 수월한지. 넓은 대학 부지를 관통하는 길을 걸으며, 걷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여유까지 챙긴다.


순례길 첫날밤에 묵었던 보르다 산장에서 저녁을 함께 한 이들을 길 위에서 자주 떠올린다. 세 번째로 이 길을 찾았다는 미국인 주먹왕 랄프는, 경험자의 조언을 해달라는 산장 주인의 말에 "당신들의 가방은 너무 무겁다"라고 답했다. 당시 웃으며 격하게 공감했던 그 말을, 매 걸음마다 사무치게 되새긴다.


꾸역꾸역 배낭에 구겨 담은 물건들은 요긴함을 뽐내기도 전에 무겁기만 한 짐이 된다. 길의 종교에 따르면 '원죄', 불교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업보'가 아닐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짊어져야 할 무게가 모든 순간을 지배하고 마는 아이러니. 다 내버리고 싶은 욕망과 언젠가는 필요하리란 욕심이 끝없이 충돌한다.


처음 만난 새하얀 풍차


힘겨운 하루들을 맞닥뜨리다가, 동경하던 유랑의 삶에 진한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일정한 정착지 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보헤미안의 정서를 무척이나 선망했건만, 거점 없는 방랑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지금 지닌 것만으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자본주의의 과도한 생산에 길들여진 현대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용서의 언덕...


순례자라면 꼭 들러야 한다는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을 오르며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역만리 타지까지 와서 이 길을 걷기로 한 나 자신의 무지와 만용을 용서하자. 지나치게 길었던 동경의 나날과 준비 없이도 쉽게 걸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오만한 판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로 한다.


SEUL 9700km


서울로부터 9700km. 이 먼 곳까지 찾아와 꾸역꾸역 걸음을 떼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언덕에 섰던 이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를 용서했을까.


용서의 언덕에서 하산하는 내리막도 만만치 않지만, 수비리의 극악한 경사보다는 훨씬 여유롭다. 생장에서 18유로 주고 산 스틱의 밑창 고무는 이미 다 헤졌다. 날카로운 스틱 끝이 딱딱 바닥 찍으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낸다. 생전 써본 적 없던 도구이지만, 스틱 덕분에 피레네 산맥도 용서의 언덕도 무사히 넘었다.


순례길의 상징, 조개껍데기


내리막이 끝난 뒤에도 마을 두어 개를 지나며 3시간 가까이를 더 걸어야만 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에 멈출 수 없는 걸음. 발바닥도 아프지만 무엇보다 그늘 없는 뙤약볕이 많이 힘들었다. 이 길의 끝에서 대체 무엇을 얻을까.


심심풀이 드로잉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에 도착했지만, 예약한 알베르게가 마을 끝에 위치해 있어서 거의 기시피 했다. 나보다 먼저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 있는 나의 업보가 반갑다. 40도가 넘는 기온에 마을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라 순례자들을 잠 못 이루게 한 열대야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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