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지나치게 험난했고, 그래서 걷는 속도가 다소 느려졌으며, 그렇기에 예정보다 늦게 수비리에 도착했다. 이는 괜찮은 사설 알베르게의 만실로 이어졌고, 결국 공립 알베르게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4인 정원의 도미토리는 다소 열악하고 번잡했다. 불편함도 청춘이라 자위할 수 있던 20대였어도 쉽지 않았을 이 공용 침실을, 자본의 맛을 알아버린 30대에 사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삐걱이는 2층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다시 고민했다.
내 맘은 몰라주고 푸르기만 한 하늘
씨에스타 직전, 동네의 유이한 레스토랑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아부지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못해먹겠다. 파업이다. 하루는 쉬어야겠다. 그렇지만 여기는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 내일은 걷지 말고 점프하자.
어차피 산티아고 순례길을 전부 두 발로 걷겠다는 목표는 세우지도 않았다. 스스로의 체력과 여행 스타일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을 넘어서는 만용은 자체적으로 기각하고 시작한 길이다.
대안이 없는 길을 무작정 걸어 가까스로 도착한 마을에서 결단을 내렸다. 지금은 특정 구간을 무사히 걸었다는 성취감보다, 바닥난 체력을 적정 수준까지 돌려놓는 쉬어감이 절실했다.
맥주를 앞에 둔 진중한 대화를 거쳐, 다음 종착지이자 이 길 위의 첫 번째 대도시인 팜플로나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알베르게에 붙은 버스 시간표도 확인하고 정류장도 확인했다. 나흘째는 처음으로 평안하리라 믿었다.
놀랍지 않게도, 이 믿음은 장렬히 부서졌다.
Domingos no hay servicio. 일요일은 운행 안 함. 구글맵과 파파고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어이없는 실수여.
예정된 버스 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깨닫게 된 현실에 허탈함을 느낄 기력도 없었다.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순례자에게 팜플로나까지 같이 택시를 타겠느냐 제안했고, 그 역시 기꺼이 동행하기로 했다.
우버도 Free Now도 닿지 않는 스페인 구석 마을에서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현지인에게 콜택시를 요청하는 것. 몇몇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근처 Bar의 주인에게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흔한 일인지 익숙하게 메모를 적어 건네준다
25분 여를 기다려 마침내 택시에 탑승했다. 쾌적한 시트에 앉아 창 너머의 들판과 언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곧게 뻗은 포장도로로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굽이굽이 휘어진 비포장도로로 느릿하게 걸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특별히 아름답거나 유난한 의미가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아직은 순례길을 향한 애정이 생기질 않는다.
한적한 팜플로나 광장
무사히 팜플로나에 도착하여 쿨하게 더치를 하고 헤어졌다. 덕분에 무사히 왔노라며 "부엔 카미노"라는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광장과 성당을 슬쩍 둘러본다. 일요일 정오 즈음인데 미사를 보고 있어서 조용히 걸음을 뗀다. 스페인이 출전한 여자 월드컵 결승전을 응원하는 광장을 지나 강변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사람이 적지 않은데도 고요한 도시가 신기하다.
문명이다 문명!!!!!!
다인실 도미토리에 학을 뗀 지라 단독 욕실이 딸린 2인실 숙소를 예약했다. 방문을 여는 순간 정갈한 침구와 깔끔한 화장실을 마주한다. 문명의 세계에 돌아온 기분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중심인 구시가지로부터는 거리가 있지만, 다음날 걸어야 할 까미노 길과 가깝다.
5일 차의 길은 순례길 필수 코스 중 하나이자 또 다른 언덕길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걷지 않을 수 없기에, 처음으로 동키를 이용하기로 한다.
팜플로나 대성당
여행의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단순히 순례길을 끝까지 걷는 것이 아니다. 이 길의 종착지까지 무사히 건강하게 걸어보는 것이다. 산티아고의 의미를 언제쯤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안고 편안한 침구에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