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용 Nov 21. 2017

나도 '설마'라는 마법에 걸렸었다.

아이슬란드에서 고장 난 카메라 배터리

'주사위를 2번 던졌을 때, 눈의 합이 9가 나올 확률을 구하시오.'


주사위를 2번씩 10번 던져본 적이 있다. 11.11%라는 확률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 성격이 그랬다. 독약도 먹어보고 나서야 '아, 이게 독약이었네.' 하는 성격. 당시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이런 나를 답답해했다. 알려준 대로 풀면 되는데, 왜 스스로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지를 말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사실'이었고, 어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답'이었다. 나를 답답해하듯 나도 어른들이 답답했다. 그런 어른들에게 나는 들으란 듯 되물었다. "10번 던졌는데, 왜 9가 한 번도 안 나오죠?"불확실성에 대한 어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시 해봐, 설마 안 나오겠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자, 나도 정답을 찾게 되었다. 사회는 내게 답을 요구했고, 나는 숫자로 답해야만 했다. 과정과 절차는 답 아래로 쌓은 작은 돌일 뿐이었다. 돌로 쌓은 벽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큼지막한 돌들 사이로 몽글몽글한 돌을 끼워 넣어야 했다. 보다 튼튼한 벽일수록, 나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져갔다. 몇 년이 지나자 이젠 '숲을 봐야 할 때'라고 했다. 풀 한 포기보단 숲이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물었다. "이거 틀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은 내 곁을 떠났던 담당자가 했던 마법 같은 주문이 기억난다. 

"에이, 설마."


Skólavörðustígur, 101 Reykjavík, Iceland



어느새 나도 마법에 걸려있음을 깨달았다. 아이슬란드, 집에서 8,400km 떨어진 곳에서다.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던 카메라는 결국 켜지지 않았다. 원인은 중국산 비품 카메라 배터리 탓이었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에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고장 난 모양이다. 한국에선 잘 썼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상 문제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여태 껏 잘 썼으니, 앞으로도 잘 쓰리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슬란드 여행 짐을 싸며 한번쯤 카메라 배터리 걱정이 되긴 했었다. 우려를 표하는 인터넷 후기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에이, 설마'


마법에서 깨어난 현실은 참담했다. 사진이 빠진 여행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번엔 비싸더라도 정품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미국 출신 여행자가 있었다. 그도 아이슬란드에 와서 추위에 배터리가 오작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글에 서비스센터의 위치를 기록해두었다. Nýherji. 글에 첨부된 지도를 따라갔다.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차에서 내리며 본 전자기기 광고판에 맘이 한껏 평안해졌다.

환한 매장 내 직원들이 두터운 하얀색 융으로 진열대를 조심스레 닦고 있었다. 조금 전 오픈 한 모양이다. 진열대 위 전시품들에도 눈길이 갔다. 노트북, 가방, 헤드셋 등 최신 IT 기기들이었다. 뭉친 어깨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하지만 카운터 직원에게 배터리 가격을 듣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니 A7ii를 사용 중입니다. 배터리가 작동하지 않아 하나 사러 왔습니다."
"그것 참 안됐습니다. 많은 여행자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A7ii면 FW-50이 맞죠?"
"맞습니다. 재고가 있을까요? 얼만가요?
"17,000 ISK입니다."
"네? 아니 가격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확인해주실래요?"
"이 가격이 맞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다. '아이슬란드' 프리미엄이 더해진 배터리 가격은 살인적이었다. 1SK가 약 10원이니, 17만 원쯤 되는 셈이다. "한국에선 5만 원이었는데.." 나의 푸념을 듣던 직원은 가격이 말도 안 되지만, 아시아 섬나라에서 이 곳까지 운송료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회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계약서가 지칭하는 대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쥐더라도 마음이 급한 자가 '을'이요, 돈이 없더라도 마음이 여유로운 자가 '갑'이었다. 을은 갑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맘 속엔 불만이 일었지만, 한국과의 차액은 어리석음의 대가로 치부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 생각하니 누군가를 미워할 필요도 없었다.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설마'는 효력을 다했다. 다시는 어리석은 주문을 외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숨죽였다. 아내는 아직까지도 한국에선 카메라 배터리가 5만 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레이캬비크를 떠나며


매거진의 이전글 '할그림스키르캬' 와의 아쉬운 만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