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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을 요리하다 Feb 03. 2022

[굴 솥밥] 어우러지는 사람 vs 줏대가 강한 사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본은 '드라마가 끝났다' 짤입니다.



  명절이 끝나면 몸에는 뱃살이 남고 냉장고엔 양가에서 받아 온 온갖 식재료가 남는다. 받아 온 음식들을 정리하던 중 알이 굵고 실한 생굴과 톳, 그리고 무를 발견했다. 마침 백신 접종 직후라 보양 음식이 필요했는데! 냉장고 털이도 할 겸 굴 솥밥을 지었다.


  굴밥을 지을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포인트는 굴을 넣는 시점일 거다. 풀어 말하면, 1) 굴을 처음부터 넣고 밥을 짓느냐 / 2) 밥 짓는 도중에 굴을 넣느냐 가 꽤나 중요한 문제이다. 백종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방식 다 괜찮다고 했으니 정해진 답은 없는 듯하고, 그저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굴밥 재료. 쌀, 굴, 무 세 가지만 있어도 맛있는 굴밥이 된다. 나는 톳과 가지, 버터를 더 넣었다.


  굴을 처음부터 넣고 밥을 지으면 굴밥의 굴 향기는 더욱 강해진다. (당연하다! 오랜 시간 넣어두었으니 그 향이 고루 퍼질 수밖에.) 대신 긴 조리 시간으로 인해 굴의 형체가 다소 퍼질 수 있다. 반대로, 굴을 중간에 넣고 밥을 지으면 굴의 탱글한 형체와 식감은 잘 보존할 수 있다. 대신 굴 향기는 전체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내 향기를 퍼뜨리며 다른 이들과 어우러지는 사람일까- 아님 내 형체를, 줏대를 내려놓지 않고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일까? 예전엔 "절대 저 사람들과 똑같은 부류가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물들지 않으려 악으로 깡으로 버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이직한 회사의 사람들과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 너무 멋져서,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아주 빠르게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결국 나는 그냥 똑같은 굴일 뿐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곳이 어떤 조직이냐에 따라서 나는 내 향기를 내어주기도, 내어주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 난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어느덧 사회생활 12년 차 고인물이 된 지금의 생각으론, 설령 내가 조금 쪼그라들지언정 사람들에게 내 향이 배게끔 할 수 있는, 존재감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좋은 향이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굴 향 가득한 밥을 먹고 싶어서 처음부터 굴을 넣고 밥을 짓기로 했다. (백종원 선생님이 그렇게 하셔서 따라한 건 아니라고 치자.) 30분 정도 불린 쌀에, 밥 물은 대부분 버리고 (무와 굴에서 수분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채 썬 무를 깔아준다. 부재료가 있다면 무 위에 올려주고 (나는 가지와 톳을 넣었다) 가장 마지막엔 굴을 듬뿍 올린다.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굴이 상당히 작아지기 때문에 굴 양은 좀 많다 싶을 정도로 올려주어도 좋다. 감칠맛을 더하려면 버터도 조금 넣어 준다. 사용한 쌀에 따라 백미 또는 현미 모드로 고압 취사해 주면 끝. 일반 압력밥솥으로도 충분히 깊은 맛의 솥밥이 완성된다.

  

  취향껏 만든 양념간장 한 스푼 넣어 슥슥 비벼 먹으면, 톳에도 쌀알에도 온통 굴 향이 가득하다. 만약 어떤 못되어먹은 얌체가 젓가락으로 굴만 쏙 쏙 골라먹어 굴 알맹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거 원래 굴밥이었나 본데? 완전 굴 향인데?" 하고 맞출 수 있을 만큼 진한 굴 향이다. 쌀알과 함께 밥솥의 무시무시한 압력을, 또 고열을 견뎌낸 굴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미친 듯이 뿜어내고 장렬하게 쪼그라든 것이다.

 

  세상에 내 향기를 전할 수 있는 멋진 삶을 살아봐야지.








생각을 요리하는 냐냐

요리하며 생각하고, 생각을 요리합니다

마케터, 웹드라마 PD부터 개발자까지, 본캐 콜렉터

부캐는 건강식단 인스타그램(@nya_days)을 운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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