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ure Mind Makes Powerful Energy!! -
(2)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고 싶은 본능적 소망을 지니고 있다. 사실 누구나 맑은 심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을 의식하며 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는 무의식 중에라도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정화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마음이 우선 고요하게 되어야 영혼도 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로 어쩔 수 없이 찌들게 되는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은 치유받고 싶은 갈망의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느끼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
빈한한 삶이 때로는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겉모습이 초라하거나 추하다고 해도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의 그 어느 어두운 구석도 밝게 비추는 힘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천하의 '절세가인' 일지라도 어둡거나 때가 묻은 영혼의 소유자는 언젠가는 악취를 풍기며 본색을 드러낸다.
나는 지금 종교적, 명상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든 디지털 기기를 능숙히 다루고 SNS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빠르게 돌아가는 세태에 발맞추느라 정작 내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맑은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시절엔 나도 맑은 시를 읊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맑은 영혼의 위대한 힘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 힘이 상당히 소진되었음을 느끼며 이전처럼 다시 맑은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어진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싶어 하는 이들이 아직은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인식조차도 없거나, 어렴풋이 영혼에 대해서 느끼고는 있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가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게다가,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진 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의 영혼에 또다시 수많은 상처를 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영혼은 같은 색깔끼리 서로 합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을 보고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 사람도 분명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용케도 같은 모습을 알아보고 저절로 한데 뭉친다. 그리고는. 그들의 영혼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맞추어 하나의 유니온(Union)을 만들고 각각의 활동의 색깔과 양상을 규정짓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것은 SNS에서 조차도 발견이 되는 것 같다. 실제의 자신보다 어쩌면 더 과장되었을지 모르는 인스타그램의 피드 이미지들 속에서도 용케도 서로 비슷한 느낌을 찾아 공유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수도를 하거나 명상과 요가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맑은 영혼을 가꾸는데 아주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간 수도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세속과 시류에 발을 담근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파우스트가 우리의 영혼을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릴 때처럼 언제나 영혼이 상처를 받거나 깨어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조급함, 허영심,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특히 욕심으로 인해 영혼이 탁해지거나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을 잃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도 한때는 화장품 매니아였다. 백화점엘 가도 화장품 코너 앞에서 발길이 머물기 일쑤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화장품 용기들은 언제나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많은 화장품을 모두 구입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설레게 하는 그 어떤 힘이 분명 화장품에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냥 행복해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나 역시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지닌 하나의 인간이기에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만큼, 다른 이들이 그저 인사로 하는 말일지라도, ‘예쁘다, 아름답다, 젊어 보인다’라는 말을 해주면 정말 그렇다고 믿고 싶었고, 나중에는 정말로 내가 참 아름답구나. 하는 착각도 일부러 즐겼다. 사지육신이 멀쩡하고 이목구비가 온전하다는 것만도 분명 아름다운 것이며 신에게 감사한 일이었기에 나쁘 달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던 나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영원할 수만은 없는 외적인 아름다움에 회의가 들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젊고 어여쁜 연예인은 물론이고 인스타그램에서 각종 필터 효과로 다소 각색된 아름다움을 뽐내는 사람들조차도 이젠 그냥 다 좋아 보인다. 아직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벌써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공허해질 때가 더러 있기도 하다.
그런 나의 마음이 무의식 속에 머물다가, 오랜만에 만난 어떤 분과의 대화 속에서 얼결에 튀어나왔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가니 별로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반짝이는 눈빛과 신뢰감 깃든 진지한 어조로 그분이 말하셨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나에게 미소의 아름다움과 큰 사랑의 힘을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분의 그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아!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강한 깨달음 속에서 그때부터 나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말해왔던 <영혼>에 대해 나는 정말로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그 영혼을 들여다보고 가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그동안 내가 무의식 중에 해 왔던 것들이 과연 나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었던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영혼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맑은 영혼’에 대해 구체적 관심을 가지는 것은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눈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마치 판타지 영화와 동화적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기에 영혼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막연히 알기는 해도 그것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려 들지는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영혼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는 것을 꺼리거나, 성직자나 영험한 기운을 가진 특정한 사람의 용어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단순한 감정적 슬픔과 내가 말하는 영혼의 울음은 분명 다르다. 배가 고픈 것도, 몸이 피곤한 것도 즉시즉시 파악되건만 영혼이 외로워 울고 있는 것을 우리가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그것은 평소에 영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자각이나 탐구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영혼은 어떤 재질로 되어 있을까. 말랑말랑할까. 아니면 얼음처럼 단단할까. 물질적 개념의 표현이 허용되기는 하는 것일까. 어떤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있을까.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물질의 현상적 개념 파악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고 말지만, 그래도 영혼에 대해 보다 가깝게 다가서기에는 그마저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식(式)의 현세적, 물질적 잣대로 재어서라도 영혼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면 영혼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혼이라는 것을 잘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러한 잣대로 평가하고 분석하려는 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혼은 내 안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고는 그저 가만히 느껴야 하는 것이며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저절로 믿어지고 감각되는 무형(無形)의 실체(實體)이다. 형태가 없는데 실체라니 참으로 아이러닉 하다. 그러나 그게 바로 영혼의 패러독스, 즉 영혼의 역설적 특성이다.
영혼에 대한 각성을 하고 나서 더 깊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영혼의 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투명하고 맑은지, 또 얼마나 찬연한 광채로 빛을 내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영혼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나도 그런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아가 우리 모두가 그런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한 채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고 보듬어 준다고 생각하면 각각의 영혼을 소유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얼마나 예쁘게 보일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