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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김나영 Apr 27. 2021

22 < 여행스케치 >

감수성이 한없이 크기만 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습니다. 세계의 명작동화 속에 나오는 모든 나라들을 가보고 싶었고 우리의 전래동화를 읽으면서도 내용의 배경이 되는 실제의 지역은 어디일까 몹시도 궁금해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 학기를 준비하던 그 겨울에 나는 그야말로 자유를 획득한 어른이라도 된 양,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앞날의 푸른 꿈을 펼치려는 야무진 꿈을 세워놓고는, 주체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흥분을 누를 길이 없어 마침내 무작정 여행길에 오를 만큼 겁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산과 벌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은 나는, 영화 <닥터지바고>를 생각하며 마치 시베리아 벌판을 달려가고 있는 것 같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기차여행이었지만 설렘과 자랑스러움으로 야릇한 희열을 느끼며 보냈습니다.

그 날은 나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을 안겨준 시간이었습니다.

단 하루의 여행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앞으로 여행을 얼마나 좋아하게 될지를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첫 대학에서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과를 선택한 덕분에 역사책에 유명하게 나와 있는 명승지나 고적지는 물론 우리나라의 온 산하를 대부분 답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토록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크고 작은 여행의 시간들이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보다 멀고 보다 크고 색다른 아름다움과 삶이 있는 곳에 대한 열망까지 내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역시나 겁도 없이 무조건 가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혼자서 여행을 준비하고는,

마침내 미국과 유럽으로의 여행을 하기 위해 이번에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것도 겨우 배낭 한 덜렁 메고서. 

미국도 동부 쪽만을 겨우 돌아봐야 했고 유럽 전역을 모두 돌아볼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었기에,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가면서 힘들어도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보루와도 같은 힘을 마련해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때의 추억들은 지금까지 내가 남모르게 간직하고 있는 나의 힘의 원천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협소하고 근시안 적이던 것으로부터 한층 넓게 확대되었고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도 더욱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았고, 매사를 보다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큰 세상을 잠시 경험해본 것만으로도 내가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의 마음이 보다 큰 그 어떤 것으로 채워진다면 내가 무한정 큰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옛날에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다니는 풍류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 그렇게 하려면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삶이 어느 정도는 보장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행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소비적, 향락적 여행에 시간과 경비를 쏟아붓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한여름에 너나없이 우르르 몰려가듯 떠나는 피서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의 마음을 보다 깊이 있고 풍요롭게 해 줄 그런 여행을 해야 합니다. 

일생의 단 한번 있는 여행이 될지라도 그것이 삶의 질을 변화시켜줄 수 있을 만큼의 의미 있고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해마다 어딘가로 남들을 따라 덩달아, 혹은 때우기 식으로 잠시 일상의 탈출 정도가 되는 것에 불과한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선망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어떤 노인들은 여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역마살이 끼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돌아다님으로써 안정된 삶의 기반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말일 것입니다.

사실 자기만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책임져야 할 부양가족이 있는 상태라면 분명 자제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에 곤란함이 생기지 않는 한도에서라면 여행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여행이 이미 자주 가던 곳으로 향해 떠나는 것이 되면,

그때의 여행에는 마음의 휴식과 안정감 또는 재충전의 의미가 많이 깃들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보지 않아서 지식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되면,

실제적 체험을 통해 그동안 지녔던 막연한 선입견을 올바르게 바꿀 수 있게 해 줍니다.

생각했던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사고(思考)의 유연함을 저절로 익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행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것이 될 때에는,

어떤 신기한 경험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이 있어서 좋습니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일종의 스릴감마저 느끼게 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여행이 되었든지 제대로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여행은 자신을 그동안 머물던 자리에 잠시 두고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러 떠나는 것이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온전히 그 자신을 깊이 바라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 속에서 혹은 외부적 환경을 통해 투영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은 우리에게 풍부한 감성과 깊은 통찰력을 길러줍니다.

여행을 통해 자신감과 여유로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행 속에서 겪은 경험과 관찰들이 축적되어 있다가 앞으로의 삶에서 어느 순간 지혜로움을 발휘하게 해 줍니다.

세상의 요모조모를 구경하는 재미는 그 어떤 재밋거리들 보다 뛰어납니다.


스스로가 풍류객이라도 된 듯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거닐면 마치 역사 속에서 그곳을 유유자적하던 그 시대의 철학자라도 된 듯 마음속에서 어떤 개념들을 끄집어내서 심도 깊은 사색을 하게 해 줍니다.


여행 중에, 낯선 사람을 만나도 먼저 마음을 열기만 하면 상대방도 마음을 열어 보이며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서로 간의 그 어떤 적의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미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게 된 자신에게 대견함을 느끼게도 될 것입니다. 

온 세상과 온 인류를 향해 마음을 열면 열수록 보다 큰마음을 지니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케일이 큰 삶을 꿈꾸게 됩니다. 또한 그런 용기도 생겨나게 해 줍니다.


여행을 많이 하면, 주변에 널려 있는 모든 사물을 마치 처음 대하는 듯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나고 전에는 몰랐던 것까지 세세하게 발견하는 관찰력이 커집니다. 시인처럼 삶과 사물을 관조할 수 있게 되고 화가 나 사진예술가처럼 남다른 섬세함으로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포착해낼 수 있게 됩니다.


홀로, 크고 낯선 땅 어딘가에 놓임으로 해서 무한히 커지는 자아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대자연과 크나큰 문명의 흔적들과 무수히 많은 타인들 속에서 갑자기 너무도 왜소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겸손과 감사의 마음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한 생각해보면 너무도 두려울 수 있는 그 순간에 그래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을 돌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새삼스럽게 그 절대적 힘과 사랑을 지닌 존재-그것을 하늘이라 말해도 상관없습니다-에 대해 간절하게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조물주 앞에 모든 피조물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울 것만 같고, 그래서 어떻게든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도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은 나를 만나고, 다른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신을 만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좋은 명상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긴 시간 동안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나그네가 되어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긴 여정의 시간 동안, 크고 작은 여행들로 적응력을 키워나가고 힘을 길러 놓는다면 삶이라는 큰 여행을 하기가 보다 수월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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