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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김나영 Apr 27. 2021

28 <외부 자극으로부터 초연하기 >

요즘은 집이라는 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휴식을 취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으며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중요한 장소라 여기게 되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집안을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게 꾸밀 수 있을까 하고 집을 가꾸는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잘 꾸며진 집을 보고 나면 왠지 흐뭇하기도 하고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 집의 분위기와 매치시켜가며 그들의 개성을 파악해보고 하는 것들에 흥미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서 비롯된 생각인지는 몰라도, 제 아무리 잘 꾸몄다고는 해도 집의 놓인 물건들이 산만하게 널려있고 제대로 정돈이 되어있지 않거나 먼지가 많고 지저분하다면 그것은 인테리어는커녕 집이 주는 본래의 의미조차 상실해버린, 그야말로 많은 물건으로 흉내만 내보려 하는 낮은 수준의 집 꾸미기를 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인테리어의 기본은 청결과 정돈된 느낌, 그리고 여백의 공간미를 최대한 살려서 기운이 잘 순환될 수 있게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많은 비용을 들여 집을 꾸민 대로 그 상태를 늘 유지하려면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집을 위해 끊임없이 닦고 가꾸는 사람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다른 집보다 식구가 많은 집은 더욱 쉽게 어질러지기도 하고, 유난히 잘 어지럽히고는 치우기에는 게으른 사람들이 사는 집과, 자꾸만 밖에서 이런저런 것을 가지고 들어오기만 하고 정돈을 하지 않아 점점 사람이 물건에 치일 정도로 비좁은 집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에는 물론 심성에도 아주 나쁜 영향을 주게 될 것만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집엘 들어가면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을 때도 있습니다. 공기의 순환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탁한 기운이 머물러 있는 그 집에서는 에너지의 재충전은 고사하고 그 어떤 창조적인 삶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꼭 필요한 것을 빼고, 그리고 허전하지 않을 정도 내에서, 물건이 적으면 적을수록 오히려 잘 꾸며진 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까지 환해지도록 시원하게 꾸며진 그런 집,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도 이런 것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실내 장식을 하듯 잘 가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청소를 하듯 정화를 시켜주며 지저분한 물건은 자꾸 버리고 정돈해서 잘 보관하듯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감정과 관념들을 자꾸만 여과시키고 걸러내고,

또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롭지 못한 생각들은 미련 없이 버리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닦아내야만 좋은 마음 집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잘 정돈된 쾌적하고 아름다운 집과 같이 될 때 우리는 거기서 쉬기도 하고 평온함과 잔잔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물건이 가득 쌓인 집처럼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외부에서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수많은 정보들이 조금도 걸러내지 못한 채 모두 쌓여서 나중에는 감당하기가 버거워지기도 합니다.


외부로부터 스며들어와, 우리를 자극하고 슬그머니 마음의 방에 자리하는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 상실감과 열등감, 수치심과 자책감, 미움과 원망, 과도한 집착과 열망, 이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염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들로부터 오는 공포와 분노, 경제적 곤란과 정치적으로 암담한 현실을 맞이할 때 생기는 무력감과, 살면서 느끼는 크고 작은 슬픔과 외로움의 감정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돌아가면서 혹은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우리를 짓눌러 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많이 쌓아두면 쌓아 둘수록 지저분한 곳에 들어섰을 때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울하게 되고 영혼도 점점 생기를 잃어만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의 방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오려는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깔끔하고 단아한 마음의 방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그 어떤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초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미래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나치게 앞서서 온갖 걱정 때문에 살이 오를 새가 없을 정도로 예민하게 굴던 나를 안타깝게 여기시던 어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말이 떠오릅니다.

“케세라세라!” 어머니는 그 말의 뜻이 “될 대로 돼라!”라고 하시며, 어떤 일이 걱정이 되거든, 하늘에 맡기는 믿음으로 모든 걱정의 마음을 놓아버리고 그렇게 외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정말로 그런 뜻을 담고 있는지는 아직도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나에게 그것은 어떤 주문과도 같이 마음을 편안히 다스리는 데에 아주 효과적인 장치가 되어주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많은 걱정들로 삶을 살다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가 되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에 의해 가까스로 얻어낸 어머니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어 준 것입니다.

적어도 나의 마음의 방에 쓸데없이 지나친 걱정이 깃들지 못하게 하는 살림살이 하나를 일찌감치 장만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걱정이라는 것도 마음을 어지럽히려고 침입해오는 하나의 외부적 자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과는 결코 온전히 한 식구로 살아갈 수 없는 이방인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 마음의 방에서 조그만 한 구석이라도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두렵고 걱정이 되는 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일지라도 “될 대로 돼라! 죽기밖에 더 하겠나 “ 하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마음의 담력을 키워두십시오.

그것은 진정 어떤 보이지 않는 큰 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본심에는 너그러운 神이 자신을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의 일입니다. 어떤 친구가 다른 어떤 친구에게 화가 나서 나에게 일종의 푸념을 하는데,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잘 들어주기도 했지만 상대 친구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음을 나름대로 합리화시켜가며 말을 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서로 좋게, 좋게 생각하고 이해해서 화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무작정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는지 빈정거리는 말투로, 너는 왜 매사를 그렇게 합리화시키는 거냐고 말했습니다. 그저 살며시 웃어 넘기기는 했지만 뜻밖의 말을 들은 나는 정말 내가 잘못하는 것일까 하고 자못 골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나의 속사정도 모르면서 무작정 오해해서 따져 묻는 친구에게 억울하게 잘못 인정되는 것이 싫어서 나름대로의 해명을 이렇게 저렇게 했더니, 너는 왜 그렇게 변명이 많으냐고 했습니다. 합리화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상황일 때 쓰는 말인지 잘 몰랐던 나는 합리화라는 것이 변명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 줄 알고 마음속에 합리화에 대해 안 좋은 개념 정리를 해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합리화에는 참으로 좋은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자어의 뜻을 풀어보면, 합리화란 <순리에 맞게 만들어간다>라는 것이 됩니다. 순리에 맞춘다는 것은 모든 일을 그릇됨이 없이 조화롭게 이루어 간다는 것이므로 합리화를 잘한다는 것은 조화롭고 평화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나쁜 일을 해놓고서 합리화를 시키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들의 합리화는 모든 사람이 보기에 결코 합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그 추함이 금방 드러나고 맙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크게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합리화를 시켜가며 무조건 덮으려 한다고 해서 그릇된 것이 옳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잘못된 남용으로 인해 <합리화>의 본래의 좋은 의미가 퇴색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신과적인 용어 중에도, <합리화(合理化)>라는 것이 있습니다. 합리화는 자기 방어기제의 하나로써, 우리의 정신이 건강하게 지켜지도록 하는데 아주 요긴한 것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 원인을 그쪽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을 지나치게 원망하거나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보호 장치인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합리화를 할 수 없다면, 많은 사람이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지게 되기도 하고 욕구불만이 한없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어떤 힘겨운 일이나 감정에 맞닥뜨릴 때,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그릇된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모든 것이 자신의 탓으로만 여기려는 사람들은 자기혐오라는 정신적 질환을 앓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생각 만으로라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어봄으로 해서, 그 일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 내가 왜 이런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를 돌아보고 모든 것이 나의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힘을 줄 수 있도록,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잘 활용하면 보다 건강한 정신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사건을 원만하게 풀기 위해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보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자의 미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자신만을 놓고 볼 때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무조건 자책하는 것이 결코 옳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서는 동요도 잘하고 흥분도 잘하지만 막상, 너무나도 큰 사건이나 상황 앞에서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자극으로 인해 치달아 가지 않도록 자동 제어장치를 마련해 둔다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나치게 감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자동 제어장치란,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 비우기>와 <믿음>, <합리화> 등과 같은 것을 말하며, 이에 더 보탠다면 <긍정적 자기 암시>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믿음 갖기 > <고공비행하기>등이 있습니다.


<고공비행하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고소공포증으로 어지러움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오히려 공포가 덜 느껴진다고 합니다.

작은 새가 되어 낮게 날아다니듯이 살아가면, 작은 일에서도 순간순간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겠지만, 보다 큰 새가 되어 어지간한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정도로 아주 높은 곳을 날아간다면 우리의 삶을 훨씬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비행기가 오랜 시간을 이동할 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류권을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더라도 비행기는 날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지구의 대기권 중에서 대류권보다 높은 곳인 성층권에서 날고 있는 것입니다.

대류권에는 기온의 차이도 크고 수증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나 바람과 같은 기상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있으므로 보다 안전한 비행을 위해서 기상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성층권을 날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마치 대류권에서처럼 비바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보다 차원이 높아져서 마음이 항상 크고 평온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비바람이 없는, 즉, 마음의 미동도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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