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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김나영 Apr 27. 2021

29 < 알맹이 잃지 않기 >

우리의 몸에 뇌가 없거나 심장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살아갈 수도 없거니와 산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새로운 종의 동물이거나 외계인이라 명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의 현실 속에는 그와 같은 별종이나 외계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또한, 알맹이가 빠져있는지도 모르고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일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광고의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살면서, 그 내용물의 진가가 터무니없이 과장돼서 본래의 상품이 우리의 눈에 왜곡돼서 들어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허위적인 사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습관까지 생겨버렸습니다.


본래의 가치 그대로도 이미 충분히 의미가 있는 데도 우리는 그것을 치장하는 데에 점점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게 되기도 했습니다.

꽃을 받는 것만도 사실은 무척 기쁘고 감격스러울 수 있는데도 겨우 몇 송이의 꽃에다가 더욱 화려한 갖가지 재료들로 겹겹이 둘러쌓아 포장함으로써, 불필요한 낭비를 하는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니 혼자서만 안 그럴 수도 없게 되어버린 듯합니다. 

상품의 가치를 올리는 것이라며 일반 상품들 모두가 겉 꾸밈을 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듯합니다. 물론 내용물도 그에 맞게 훌륭하다면 그나마 좋은 판매 전술로 여길 수도 있기는 하겠지요. 어떤 경우에는 똑같은 과일인데도 멋지게 포장해서 한쪽의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아두니, 훨씬 비싼 값인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팔리게 되는 것과 같은 우스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요즘은 결혼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서도, 결혼식의 본래의 의미는 이미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 가는 듯하고 오히려 무슨 이벤트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치러집니다. 엄숙함이 사라지고 어찌 보면 장난스럽게 변해가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아름답고 고결한 신랑과 신부의 혼인의 서약과 새로운 출발을 기쁘면서도 숙연한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는 결혼식이 되어야 하는데, 결혼식을 거행한 후의 여흥이야 얼마든지 즐겨도 되겠지만, 안 그래도 번갯불에 콩을 볶듯 순식간에 해치우는 결혼식인지라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결혼식이 되게 해 주려는 여러 가지 배려에서 비롯된 까닭이었을지라도, 점점, 진정한 의미가 빠진 그저 이벤트로서의 결혼이 되어가는 것 같아 결혼식장엘 다녀올 때마다 어쩐지 뭔가가 빠진 듯한 허전함을 느끼곤 합니다.


결혼식뿐만 아니라, 명목을 가진 그 어떤 행사들에서도 그 행사가 지니는 목적의식과 본질적 내용이나 의미가 결여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행사라는 것 자체도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니 행사 자체가 내용보다 우선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일정한 형식과 틀이 내용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달하며, 그 윤곽이 뚜렷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에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자꾸만 만들어지는 형식의 틀 속에서 우리는 점점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게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랜 역사를 거쳐 수많은 종교가 있어왔지만 사이비 종교는 빼고라도, 저마다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대표적인 몇몇 종교들도 애초의 그 종교가 설립될 때의 목적과는 점점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종교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법칙들이 도로 자신에게 돌아와 그 종교를 쇠락하게 하는 부메랑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자정(自正)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 종교에서 추구하는 거룩한 핵심에 다가서기 위해 마련된 것인데,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규칙들이 되어 버렸거나, 그러한 규칙들을 근거로 사람들이 무작정 따르기를 강요하는 종교가 된다면 더 이상 종교의 본래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알맹이가 빠진 언어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습니다.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핵심이 되는 하나의 언어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한 것을 잘 헤아려서 자신이 그 종교를 택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갖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휩쓸리는 마음이 되거나 알맹이가 빠져버린 신앙이 되지 않도록 깊이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농부가 곡식의 나락을 거둘 때, 알곡만 거두고 쭉정이는 버립니다. 우리가 알맹이 없이 산다면 우리도 나중에 하늘과 합류하고자 할 때, 쭉정이처럼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알맹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알맹이란 우리의 정신과 혼을 이루는 그 무엇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의 선조는 그것을 가리켜 얼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빠진 사람으로 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일을 할 때에도, 공부를 할 때에도, 선행을 할 때에도, 예술작업을 할 때에도 우리는 그 알맹이와 핵심적인 의미를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좋은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문제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에도 그 알맹이가 들어 있으며, 평화를 위해 일하거나 기쁨을 전하고자 하는 것에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숭고한 알맹이는 한 가지입니다.


정말 맛이 있는 음식은 차갑게 식어서도 맛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외부적 상황이 달라진다고 해도 그 핵심만 간직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진국은 끓일수록 우러나는 맛이 있듯이 진정한 알맹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해갑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처음의 가치와 의도를 잃어버린 채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알맹이가 완숙되기도 전에 외부적 틀에 갇혀버리지 마십시오.

또한 그런 것에 현혹되지도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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