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책임도 늘어나다
영업에 대한 갈증을 느끼다
임호는 교육팀에서 주관하는 1주일 기간의 '지점장 부임 전 교육'에 참석했다. 하반기 해외지점장으로 발령받은 예비 지점장들에 대한 교양 교육이었다.
임호는 교육 과정이 진행되는 중에 남과 다른 갈증이 생겼다. 지점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영업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경험이 임호에게는 없다. 그는 공항운송 업무와 국제업무 경력이 있다. 장춘 현지에서 공항운송 서비스업무나 대외 업무는 자신이 있다. 영업은 문외한이다. 영업은 현지에서 지점장 업무 수행 중에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 지점장으로 나가는 것은 전장에 전투하러 가는 것이다. 사람 만나서 스테이크에 와인 마시며 외교를 논하러 가는 자리가 아니다. 현지에 투입할 예비 지점장들 모아놓고 미모의 승무원 강사가 테이블 매너를 가르친다. 나이프와 포크 사용법, 와인 감별법 등을 교육한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교육이니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고마움이 생긴다. 임호는 이것이 왠지 불편하다. 강사와 예비 지점장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중에도 현지 영업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은 여전했다. 영업의 실전 경험이 없으니 두려움까지 생겼다.
영업부서가 아닌 일반 관리부서의 인원이 영업지점장으로 나가는 경우라면 회사는 그를 지점장으로 내보내기 전에 최소 한 달은 영업부서에서 일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일도 일이지만 영업 부문 직원들과 얼굴을 익히며 소통을 하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현지에서 본사와 원활한 업무 교류가 이루어진다. 영업 업무에 대한 지식도, 영업 직원과의 소통도 없는 상황에서 지점장으로 나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본사 영업에서는 자기 사람이 아닌 다른 부문 사람이 지점장으로 나가 있는데 그를 얼마나 도와줄 것인가? 영업 식구가 아닌 이 자를 어서 빨리 뭉개고 자기들 사람으로 채울 생각만 할 것이다. 임호는 향후 임원이 되면 이것을 개선할 생각이었다.
테이블 매너와 와인 역사를 배우는 것도 지점장이 갖추어야 할 소양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현지에서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지점장이 현지에서 접할 수 있는 위험의 종류, 그것을 대처하는 방법들을 과거 사례에 비추어 교육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모의 승무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준 높은 강의를 하니 기쁘고 행복하다. 짧은 시간이나마 가슴이 뛴다. 그래도 임호는 가슴 한편에 갈증을 느낀다.
신분과 지위가 상승하다
1998년 7월 1일, 임호는 장춘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뉴스타항공 베이징 본부로 향했다. 본부장에게 부임 보고를 하고 본부 식구들에게 인사하기 위해서다.
과장 3년 차이지만 지점장 신분이다. 회사는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을 제공한다. 김포공항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오전 출발 항공편에 탑승했다. 기종은 260석 규모의 보잉 B767-300이었다. 비즈니스석은 좌석 배열이 2-1-2였다. 임호 좌석은 왼편 통로 쪽 1-B석이다. 단단하고 날렵한 007 샘소나이트 블랙 하드케이스 서류 가방을 오버헤드 빈(Overhead bin)에 넣고 자리에 앉았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여승무원이 다가와 양복 상의를 받아 간다. 잠시 후 그녀는 따뜻한 물수건과 어메니티(Amenity)를 건네준다. 뒤이어 오렌지 쥬스를 가져와 좌석 옆에 놓고 간다. 그녀의 명품 미소는 하얀색 물수건의 온기에 스며들어 손등 살갗을 촉촉이 적신다.
뉴스타항공 승무원들의 미소는 특별히 환하다. 주기성 사장은 승무원 면접에서 말할 때 윗니가 8개 이상 보이지 않는 지원자는 채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임호는 말할 때 윗니 8개가 보이는지 거울을 보며 확인했다. 활짝 웃으며 말하지 않고는 윗니가 보이지 않는다.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 뉴스타항공’은 그렇게 탄생했다.
임호는 어제와 달라진 주변 공기에 흥분과 긴장을 느꼈다. 항공기 탑승 좌석이 달라지고 승무원의 서비스 내용이 달라졌다. 지점장으로 부임하는 지금 임호의 모습은 본사에서 태양항공 후예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일 때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신분과 지위가 상승했다. 그만큼 역할과 책임도 늘었다. 사장을 대신하여 회사 대표의 성격을 띠고 현지에 부임하니 자부심은 솟고 각오가 새롭다. 지위가 요구하는 적합한 사고와 행동으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 임호는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양쪽에서 쓸었다.
임호는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지점 차량을 이용하여 본부로 향했다. 본부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임호보다 6개월 먼저 베이징 관리 담당으로 발령받은 조지훈 과장이 임호를 본부장에게 안내했다. 그는 임호와 함께 입사한 그룹 공채 1기다. 중국지역본부장인 기노홍 상무와는 본사에서 이미 안면이 있었다.
“본부장님, 부임 신고 드립니다.”
“그래, 임 지점장. 축하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악수로 맞이해주었다.
“오늘 장춘 몇 시 비행기지?”
“예, 5시 비행기입니다.”
“가자, 점심 먹고 발 안마받으면 시간이 딱 맞아. 참, 오늘 점심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상국 주장이 와서 같이 하기로 했다. 옌지가 장춘지점 관할이잖아? 마침 잘 됐다. 주장이면 연변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야. 알아놓으면 임 지점장도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일행은 사무실 건너편의 중국지역본부 단골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남상국 주장은 본부장에게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북한식 억양이다.
“우리 본부장님은 바이지우(白酒) 주량이 얼마나 됩니까?”
“아, 잘 못 마십니다. 근데 좋은 사람 만나면 좀 마십니다. 오늘 주장님을 만나 뵈니 왠지 술 좀 들어갈 거 같습니다. 하하하.”
기노홍 본부장은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몸매다. 그 배에 유머가 가득 차 있는지 친화력이 뛰어나다. 그가 하는 말에는 맛이 있다. 상대방의 대화에 반응하는 순발력과 임기응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항상 웃음을 몰고 다닌다.
남상국 주장은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본부장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주장을 수행하는 비서가 미리 우량예 52도를 챙겨왔다. 주장은 레스토랑에 가짜 우량예가 많아 중요한 손님을 만날 때는 직접 준비해서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주장이 테이블 중앙의 유리 원탁 위에 잔을 모아 바이지우를 따랐다. 유리 원탁을 천천히 회전시키며 술잔을 각자의 앞으로 돌린다. 기노홍 본부장이 잔을 잡아 자기 앞에 놓으며 임호를 소개한다.
“남 주장님, 여기 이 친구가 이번에 장춘으로 발령받은 임호 지점장입니다. 앞으로 옌지에 자주 갈 텐데 잘 좀 돌봐주십시오.”
“주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춘지점장 임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임호는 잔을 들어 그와 건배하며 인사했다.
“축하합니다. 옌지 오시면 연락하십시오.”
그는 술잔을 입으로 털어 넣으며 말을 이어간다.
“동북 삼성 중에 요녕성의 선양은 태양항공이 운항합니다. 하얼빈과 장춘은 우리 뉴스타항공이 운항하고 있습니다. 옌지는 아직 항공편이 없고요. 한국 사람들 백두산 관광하려면 옌지로 와야 합니다. 서울-옌지 직항편이 없으니 선양이나, 창춘, 하얼빈을 거쳐서 옌지로 옵니다. 멀리 베이징을 거쳐서도 옵니다. 베이징을 거쳐서 오는 것이 더 빨라요. 항공기로 오니까요. 옌지에서 서울로 나가는 수요도 많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 교포들이 매년 늘고 있습니다. 서울-옌지에 직항편이 없으니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동북 삼성의 성 소재지에는 모두 서울 직항편이 있는데 옌지에만 없다고 주민들 불만이 많습니다. 옌지를 홀대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취항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장의 긴말에 기노홍 본부장이 추임새를 넣는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치주는 서울 직항편 개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중국민항총국(CAAC)을 방문하여 서울-옌지 직항편 개설을 건의할 겁니다. 뉴스타항공이 뒤에서 좀 밀어주세요.”
“제가 미는 힘이 좀 셉니다. 조심하십시오. 하하하.”
그는 특유의 농담으로 남상국 주장의 말에 호응하고는 말을 이어간다.
“여기 임호 지점장이 본사 국제업무실에서 중국을 담당했습니다. ‘94년 한·중 항공협정 체결에도 참여했습니다. 임 지점장 말을 한번 들어보시죠.”
기노홍 본부장이 바통을 임호에게 넘겼다.
“임 지점장이 설명 좀 해드려.”
“예, 알겠습니다.”
임호는 여자 종업원이 따라주는 롱징(龙井)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시작한다.
“저희도 한국 건교부에 옌지 직항편 개설을 건의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고민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대외적인 겁니다. 옌볜은 북한 국경과 맞닿아있습니다. 투먼(图们)의 국경대교(国境大桥)를 통해 중국인들의 북한 왕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북한과 지리적으로 근접한 곳에 한국 항공기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중국 정부가 외교적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한 눈치를 보는 거죠. 다른 하나는, 대내적인 겁니다. 외국 항공사의 직항편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소가 함께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옌지는 정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선양, 창춘, 하얼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족자치주이기 때문입니다. 인근 도시인 창춘과 하얼빈에는 서울 직항편이 들어오는데 옌지는 배제되니 주장님께서는 아마 조바심이 생길 겁니다. 중국민항총국은 창춘과 하얼빈에 정기편을 취항하기에 앞서 전세편을 취항하면서 상황을 주시하고 관리해 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올해 3월 말 그간 전세편으로 운항하던 창춘과 하얼빈을 정기편으로 전환하면서 중국 정부가 진일보한 관찰과 관리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작년 항공회담에서 옌지가 운항 포인트에서 제외되었지만 이제 서울-옌지 직항편도 머지않았다고 봅니다. 길어야 2년 안으로 실현될 것 같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이며 듣고 있던 주장이 임호가 말을 끝내자 술을 따르며 건배를 권했다.
“역시 본사 국제업무실에서 중국을 담당하셔서 그런지 상황 설명이 명확합니다. 알지 못했던 배경을 이해했습니다. 내일 중국민항총국과 회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부장님께서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씨에씨에!”
남 주장 일행을 식당 앞에서 전송하고 임호는 본부장의 차를 타고 뒤에 나란히 앉았다.
차는 사우나가 딸린 거대한 안마 전문업소 정문에 섰다. 붉은색의 치파오를 차려입은 키 큰 미녀 복무원이 본부장이 들어서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실내 안쪽 복도로 앞서 걷는다. 몸에 바짝 달라붙은 치파오에 그녀의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붉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매화와 봉황이 수놓아져 있다. 그녀의 어깨선에서 핀 매화가 줄기를 타고 잘록한 허리로 흘러 내려온다. 볼록 튀어나온 엉덩이 부분에서는 머리를 치켜든 봉황이 날개를 펼쳐 비상할 태세다. 그녀가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빛 봉황은 날아오를 듯 날갯짓을 한다. 그 옆으로는 매화가 흩날리는 듯하다.
둘은 침대가 두 개 놓인 고급 룸에서 가운을 갈아입고 복도로 연결된 사우나로 향했다. 온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점심에 마셨던 우량예의 독특한 향이 땀으로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냉수 샤워를 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침대의 등받이를 세우고 몸을 눕혔다. 잠시 후 앳된 소녀 두 명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원형 나무 물통을 들고 들어왔다. 아직 20세가 되지 않아 보인다. 두 소녀가 각각 본부장과 임호 앞에 물통을 내려놓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작고 가냘픈 손으로 양발을 조심히 물통 안으로 넣는다. 양손에 레몬 향의 액체비누를 묻혀서 거품을 만든다. 한 발 한 발 물속에서 꺼내 번갈아가며 정성스럽게 씻는다. 손에 묻은 비누 거품을 발바닥과 발등에 문지른다. 두 손은 발을 감싸 쥐고 아래에서 위로 쓸어올리며 엄지와 검지는 발가락 사이 사이를 간지럽히며 오간다. 살과 살의 마찰이 거품으로 미끄러지며 피부 깊숙이 잠자던 감각을 일깨운다. 레몬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소녀의 뽀얀 손에는 발 안마의 흔적이 있다. 오른손 중지의 중간 마디는 굳은살이 동그란 모양으로 박혀 있다. 왼손 중지에 박힌 군살은 그보다 작았다. 주먹을 쥐어 곧추세운 중지의 중간 마디로 손님의 발바닥을 지압하다 보니 어느 세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되었을 거다.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올라와 그녀가 겪은 베이징 타향살이의 흔적이 거기에 보인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인데 아랑곳하지 않는 소녀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무엇이 즐거운지 그녀들은 말할 때마다 환하게 웃는다. 구김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은살을 보고 임호가 느낀 연민이나 동정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연신 말을 건넨다.
“물통을 밖에 두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압을 세게 할까요? 약하게 할까요?”
“이 정도 세기면 괜찮아요?”
“어디에서 왔어요? 중국 사람 아니죠? 한국 사람이죠?”
그녀는 그 나이에 맞게 말하기 좋아하고 궁금한 것도 많다. 손님에게 발 안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생각하고 즐기는 것 같았다. 가끔 까르르 소리내며 웃는 모습은 천진난만하다. 이야기하는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기노홍 본부장이 눈을 떴다. 그는 점심에 약주를 한잔 곁들여서인지 발 안마사의 손이 닿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잘 주무셨습니까?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아, 피로가 싹 풀렸어.”
그는 목이 말랐던지 종업원이 옆에 놓아둔 광천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임 지점장은 운송도 했고 국제업무도 했으니 별걱정이 안 돼. 잘할 거야.”
“잘하겠습니다.”
“창춘행 비행기가 몇 시라 그랬지?”
“다섯 시입니다.”
“이거 끝나고 사무실 잠깐 들렸다가 공항 가면 시간 충분해. 공항 갈 때 내 차 타고 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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