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우리 부모님에게서 네 번째 딸인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애써 위안을 삼고자 갓 태어난 나를 보고 정말 열심히 키우겠노라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의사 또한, "또 딸이면 어떻습니까, 수저하나만 더
놓으면 알아서 잘 클 겁니다."라고 하며
"혹시 압니까 이 애기가 나중에 커서 영부인이라도 될지."
절망에 빠졌던 엄마는 그 말을 동아줄이 내려온 것 마냥
철석같이 믿으셨다.
의사의 그 한마디가 엄마에게 면죄부라도 준 듯이,
그리고 모진 시집살이에도 살아갈 힘을 주었던 말이었으리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게 너는 영부인이 될 거라며
정말 특별한 아이라고 해 주셨다.
내 눈앞에서 할머니로부터 아들을 못 낳은 대역죄인
취급을 받으시는 걸 보며 자란 나는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존재의 이유를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10살도 되기 전에 말이다.
바이올린, 수영, 피아노, 영어, 과외 엄마는 내게 모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것 하나 특출 나게 잘하지도 못했고 끈기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잘하는 것은 정말 따로 있었으며 어렸을 때 일찍 눈치채지 못했을 뿐,
결국 그것을 업으로 삼아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도 갖게 되었다.
대학에 갈 때 엄마의 반대는 심했다.
영부인의 길과는 너무나 멀고도 멀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잘하면 청와대에서 일이라도 하게 될 줄 아셨는지
결국 두 손을 드셨다.
아마 나는 엄마의 마지막 기대주였던가 보다.
엄마는 그렇게 내게 많은 것을 기대하셨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셨다. 설렘도 실망도 고스란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학비를 끝까지 보내주셨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을 부모가 되기 전부터 알게 되었다. 그것이 죄송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한없이 베풀어준 엄마의 사랑
그러나 보답하고 싶은 마음은 의무와 부담이 되었고
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나는 자책에 빠졌었다.
한다고 하는데.... 왜... 왜..
나의 20대는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남들이 봤을 땐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유명해지지 못한,
누가 들어도 알만한 간판을 걸지 못했다는 것에 심한 패패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할 사람을 소개한 날,
엄마는 그날부로 막내딸이 영부인이 되는 꿈을 완전히 접으셨다.(ㅎㅎ)
그래도 살면서 주변사람들로부터 너는 왠지 나중에 정말 잘될 거 같아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을 때
아 진짜 내가 뭔가를 결국엔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희망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
또다시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언덕초입부터 손톱으로
겨우 버티고 기어오르는 듯한 내가 보인다.
나는 전업주부로써 살림을 하고 육아를 하는 내내
아이를 직접 키우는 보람보다 내 인생이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긴 터널을 걷고 있었다.
스스로 일을 계획하고 내가 만든 성과에 대해 보수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떳떳한 돈을 쓰고
남들한테 인정받고, 앞으로 더 나아갈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길을 걸어갈 때 사원증을 목에 걸고 한 손에 커피를 들며 동료들과 대화하며 걷는 무리들만 보아도
부러웠다.
나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내 자리가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집안은 고요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내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버티는 중이다.
사람들마다 가치의 비중을 두는 곳이 다르듯이 나는 내 이름으로써 불리고 인정받아야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인 것이었다.
지난 8년을 아줌마, 애기엄마, 어머님으로만 불렸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곳은 아무도 없었다.
내 이름 석자로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쓰는 돈은 정말 아깝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엄마로서는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아이들과 놀 장난감을 사고, 예쁜 옷을 입혀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 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 공부하길 원하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웃어본다.
그렇게 365일 몇 년을 살다 보니 내 그림자가 서서히 없어지는 것 같이 꿈도 희망도 희미해져 간다.
첫째 임신 7개월 때까지는 일을 했었다.
아기 낳고 3개월 후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었다. 노모이신 친정엄마가 아이를 돌봐주시는 사이에
파트타임식으로 일을 나갔었는데 집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아이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아기와 거리가 먼 것들이었으니 집에만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아이생각이 나지 않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동시에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이 해방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일하러 나가는 마음이 마치 죄인이었다가 잠시 수갑이 풀린 느낌이랄까.
남이 해준 밥, 1500원이지만 남이 내려준 커피가 제일 맛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쾌감이 드는 것도 잠시, 일이 끝나면 곧바로 떠오르는 아기생각에 종종걸음을 걸었었다.
그러던 와중 개인적인 여러 사정과 아픔으로 인해 나는 온전히 집안에 있게 되었다.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건,
그동안 내가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를 놓친 거라고 자책하기도 하였지만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 인생인데 내가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나마 아이들곁에서 자라나는 매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으로 위로하였지만
가정주부라는 건 마음속 수시로 일어나는 거대한 폭풍을 하루에도 수천번씩 억지로 눌러가며
애써 웃어야 한다는 것.
마음이 너무나 힘든 직업인 것 같다.
그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혼자라서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