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쩔 수 없다고 말할까?
요즘 '강자 동일시' 라는 말을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자연스럽게 학부모들과 상담을 하게되는데 상담을 진행하다보면 자주 마주하게되는 현상이다. 내가 교육에 대해 이러저러한 부분들을 꼬집으면서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도 공감하시고 수긍한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현실속에서는 그런것들은 일단 배제되고 자녀들을 좋은 대학, 돈 많이 버는 직업, 돈 많이 버는 직장에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금까지 수긍했던 그 비판의 내용 그대로를 수용하여 실존을 살아간다. 왜 사람들은 사태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하고 있으면서 실천적 삶에서는 적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은 이렇다. 어차피 사회 시스템은 바꾸기 힘들고 차라리 이 시스템에 잘 적응한 고위 관료가 되어 힘이 생겼을 때 세상을 바꾸는 편이 더 낫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바꾼 스토리는 인류 역사에서 많이 일어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그게 가장 편하고 빠른길이기도 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조금 더 의미에 집중하고 싶어진다. 과연 나는 어떤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어떤 태도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물음이 나를 학부모들과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질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은 힘있는 자들이 지배하고 힘있는 자들의 논리와 규칙에 의해 운영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강자의 논리에 맞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늘 변화를 꾀하고 새로운 것을 외치는 부류들도 있다. 바로 이상주의자들이다. 현실의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자의 논리앞에 굴복하지 않는 부류들 말이다. 때로는 이것이 큰 전복을 일으켜 상황을 정반대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혁명은 항상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지금도 가끔 길에서 1인 시위하시는 분들을 봐도 그렇다. 아마 그들 스스로도 세상이 바뀔거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 실존과 자존을 위해서 과감히 행동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고 늘 우리의 주변에는 항상 질게 뻔한 싸움을 기꺼이하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는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장례식에도 가고 뉴스를 통해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죽음은 항상 우리들의 곁에 있으면서 한순간도 떠난적이 없다. 우리의 죽음 이후엔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돈, 명예, 우주에 비하면 아주 잠깐인 쾌락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허무의 공간에 나는 무엇을 채워넣을 것이며,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공허를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며 이러한 두려움과 고독을 창조의 재료로써 사용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앞에서 많은 후회를 할지도 모를일이다.
강자 동일시는 분석해보면 노예들이 갖고 있는 태도이다. 자기 삶속에서 자신이 주인이 아닌 항상 타자들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삶의 노예, 자본의 노예, 평균성의 노예, 물질의 노예, 허영심의 노예들 말이다. 겉껍데기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비어 공허하다. 이런 자들은 기회주의를 현실주의로, 이기주의를 합리주의로 해석한다. 뉴라이트 역사관을 갖고 있는 몇몇 지식인들의 태도에서도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가슴에는 삶의 의미와 자기존엄은 없고 왜곡된 공리주의만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들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던 최악의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난 기왕 그들이 더욱 치밀한 계산가들이었으면 좋겠다. 나무보다 숲을 보려고 하는 이상주의자들의 계산기는 더 멀리 그리고 크고 정밀하게 계산되어서 인간사회에 더 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의 계산기도 더 멀고 거시적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