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6장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Vom Lesen und Schreiben)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백승영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나로 하여금 염세적 이어지게 만들고 삶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모든 것은 허무하다고 시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삶이 고통인 것은 당연하다. 힘들지 않은 인간은 한 명도 없다. 생로병사를 겪으며 고집멸도 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것이 세상만사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삶의 모습도 긍정해야 한다.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웃을 것이고 춤출 것이다. 중력의 힘을 이겨내고 나비처럼,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명랑하게 날아올라 갈 것이다.
1. 교육의 문제
니체가 글을 쓸 당시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을 마치 노동처럼 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노예가 되어서 자신이 몇 권 읽었는지 그 수량을 자랑하거나 또는 자랑하기 위해 읽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억지로 책을 읽히는 것, 학교에서 필수 서적을 정해 놓고 강제적으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 등의 현상도 볼 수 있다. 책 읽는 것은 일종의 노동인 셈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피로 쓴 책만 읽으며 읽을 때 역시도 나의 피로써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피'라는 것은 나의 삶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발성이, 주인의식과 주도적임이 책을 읽게 만들어야 하고 책을 볼 때는 느리게, 오래 곱씹으며 비판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로 쓴 타인의 삶이 체화되어서 진정한 나의 삶을 이루는 일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이 책을 그렇게 읽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즉 "평준화된 교육 제도,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공공재가 된 지식, 학문의 노동화 및 정보화, 자본과 결탁한 저널리즘, 여론에 대한 중시, 천민자본주의의 폐해, 천부 인권으로서의 자유와 평등 이념, 그 이념의 정치적 구현체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스도교 도덕" 등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교육의 문제'이다. 물론 다른 부분들도 문제가 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의 문제에서 그 외에 모든 문제들이 파생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교육의 병폐는 참담하다. 경쟁주의, 능력주의,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는 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교육 방식 자체, 시험 문제 빨리 풀게 하기(오늘날 학교에서 수학 잘하는 자의 미덕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학 탐구의 본질적 속성과 정반대이다.), 문학 작품의 해석의 기회를 앗아가기(아이들은 모든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않고 이미 해석된 내용을 외운다.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시험 문제는 학생의 생각이나 잠재력을 끌어내고 평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워서 변별력을 높이는 데이만 집중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것으로 우열을 나누며 한편으론 오만해지며 한편으론 순종적이고 자기 학대적이 된다. 니체가 보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문제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2. 유비적 통찰
니체의 문체는 개념적이지 않고 잠언의 형식을 갖고 있다. 니체가 잠언의 형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이성적인 이론 체계에 대한 불신, 철학의 대상이자 목적인 '삶'을 담기에 철학적 글쓰기는 역부족, 언어 문법의 한계, 간결성과 함축성의 미학, 다양한 해석 가능성의 열려있음' 때문이다. 니체가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적인 추론에 의한 글쓰기를 불신하는 이유는 앞 장에서도 많이 이야기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 존재한다"이다. 또한 언어는 어떠한가? 이것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어-술어 관계 때문에 생기는 주체성의 허상과 같은 망상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아포리즘은 진리를 열려있게 하고 해석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독자는 이제 이해하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음미하고 곱씹어 보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 선언자로서 관점 주의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해석이고 관점인 것이다. 하지만 '천민'독자는 이러한 읽기를 할 수 없다. 그들을 빨리 읽어야 하고 더욱더 많은 정보를 머리에 주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생각과 해석은 사치이다.
3. 염세적 태도는 삶의 적
나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불과 10대인 나이에 세상에 대해서 염세적 태도를 갖게 된 아이들을 많이 마주한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 중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인 것은 이러한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교육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디 청소년뿐이겠는가. 성인들도 그들의 창조적 힘을 포기한다. 돈의 노예,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나만 잘 살면 되고 나 살기도 바쁘다는 이유로 이타적인 마음은 비경제적이고 위선적인 태도가 된다.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갖기라도 하면 패배자 혹은 진실하지 못한 자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진실한 것은 르상티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오직 그것만을 따르며 사막의 낙타의 짐을 순종적으로 질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체제나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능력과 힘이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들은 강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부자를 찬양한다. 부는 그 자체로 선이다. 돈(능력)은 그 자체로 자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정글 같은 사회를 '현실'이라고 부르는, 사회진화론자들(적자생존, 약육강식)은 기회주의를 현실주의와 혼동하고 이기주의를 합리주의라고 부른다. 이들이 자주 쓰는 언어는 '현실적으로'이다. 이들에게 '현실'의 개념은 작금의 사태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타협하거나 자신의 주도권을 대타자에게 내어주는 것을, 노예도덕과 원한 감정을 가진 나약한 자들의 삶의 포기 선언을 '현실'이라고 오해한다. 이러한 게으른 자들은 현실을 극복할 용기도 힘도 저항할 의지도 없으며, 가치를 창조할 명랑함도 없다. 오로지 주어진 가치들에 순종하며 죽기만을 기다린다. 큰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이들은 작은 것에서나 행복을 누리자며 '소확행'을 예찬하거나 쇼핑을 한다. 이러한 소비주의를 그들은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것을 니체는 악마라고 한다. 나는 이것에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은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춤을 춘다. 명랑하게. 인생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비로소 그럴 때에 그러한 삶의 무거움과 중력을 극복하고 명랑하게 웃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어떠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떠한가? 실패하기만 한다 해도 어떠한가? 나는 생명이요, 생명은 태어나서 숨 쉬는 것만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생'자체를 부정하고 안일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생명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