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정 Mar 18. 2018

663

센트럴, 양조위가 거닐던 거리

     


지금은 아무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왕페이(王菲)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센트럴을 가장 센트럴답게 시작하는 곳, 지하철 D2 출구다. 일종의 지름길로 향하는 입구인데, 금융가와 관광지 그리고 소호와 셩완까지 잘 뻗어나갈 수 있는 출발지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중경삼림의 왕페이 사진을 들고


센트럴에 오면 생각나는 게 있다. 손에 들린 금붕어, 배꼽이 살짝 보이는 크롭탑, 사내 녀석 같은 짧은 머리카락의 뒷모습이다. 중경삼림의 왕페이다. 오랜만에 와도 모든 게 그대로인 듯 보이는 소호 언덕들, 과일가게 아저씨와 가구를 파는 할아버지마저도 언제나 그대로다.

     


센트럴의 매력은 양면성이다. 어마어마한 빌딩들, 돈이 오가는 금융 빌딩들, 그리고 그 반대편 작은 골목들의 소호다. 남쪽은 소호, 북쪽은 노호, 서쪽은 포호 라고 불리는데. 사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곳저곳 들어가다 보면 소호나 노호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결국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슷해도 얕보면 안 된다. 지금 서울에 생기고 있는 주택가의 근사한 거리들, 예술 거리들은 이미 오래 전 센트럴에 있던 것들과 닮았다. 여의도 금융가와 이태원 경리단길이 센트럴이라는 한 곳에 뭉쳐져 있다. 골목골목 유명한 식당과 수준급의 카페들, 아름다운 뷰를 가진 고층빌딩은 셀 수 없이 많은데, 모두 허름해 보이는 길목이나 작은 간판으로 되어있어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센트럴 피플’을 구분하는 방법


센트럴의 홍콩인을 ‘센트럴인’이라 부르고 싶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수트맨과 오피스걸이다. 재미있는 것은, 홍콩의 커리어우먼들은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8자 걸음으로 걷는다. 멋스러운 무채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명품 시계와 명품 백을 들었다. 이런 차림으로 굽이 없는 플랫슈즈를 신고 8자 걸음을 걷는 여인을 본다면 백프로 센트럴에서 일하는 홍콩 여인일 것이다.


센트럴의 수트맨들은 높은 건물들만큼이나 멋스럽다. 그들을 식당으로 치자면 미슐랭 별 하나쯤은 지닌 고급 레스토랑이고, 술로 따지자면 빌딩숲 마천루가 보이는 어느 루프탑 바의 위스키다. 대부분 외국에서 학교를 나오고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인들과 일을 한다. 외국어 두 세 개는 기본으로 하는 엘리트다. 이들은 아주 바쁘다. 뉴욕의 뉴요커들만큼이나 빠르게 걷고, 항상 무언가를 보기에 바쁘며, 퇴근 후에는 타이를 풀고 센트럴 인근 펍이나 프린스 빌딩의 ‘세바’에서 술 한 잔을 걸친다.



센트럴의 양면은 소호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아티스트의 스튜디오나, 오래된 포장마차인 다이파이동이 있다. 바로 길 하나 건넜을 뿐인데, 빌딩숲과 작은 동네가 교차한다.


중경삼림의 그 가게는 이제 없지만, 같은 골목 어딘가에서.


금붕어를 든 여인을 본다면


소호의 백미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인데, 아마도 ‘중경삼림’의 왕페이를 기억하고 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때때로는 영화 ‘소친친’의 진혜림도 떠오른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이 좁고 재빠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녔다. 중간 중간 자리 잡은 갤러리도 좋지만, 셩완으로 빠지는 퀸즈로드 길을 걷는 것도 재미다. 벽화며 작은 맛집이며 특색 있는 가게가 넘쳐난다. 최근에는 올드 센트럴 이라고 하여, 홍콩에서 지정한 센트럴 관광 코스가 생겼다. 그래봤자, 당신이 몇 시간 걸으면서 모두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니 좋은 음악 하나 들으며 걷는 게 최고다.



1930년대의 스타벅스


센트럴에는 가스등 계단과 홍콩의 전통 ‘빙셧 카페’를 표방한 스타벅스가 있다. 가스등 계단은 주성치의 영화 ‘희극지왕’에 나와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닌 빙셧을 먹으러 가야 한다. 오직 홍콩 내 스타벅스 중 센트럴 지점 한 곳만이 빙셧을 판다.



‘빙셧’은 1930년대 홍콩 카페에서 팔던 팥과 우유, 푸딩이 들어간 음료다. 소호와 노호는 우리나라로 따지만 가로수길과 세로수길 정도의 의미다. 그 경계에는 외국인이 주인인 햄버거집, 이탈리안 펍, 프랑스 식당 등 외국 식당이 많다. 젊은 사업가들이 운영하는 재기발랄한 콘셉트의 국수집이나 빈티지한 상점도 이 곳의 매력이다.



갤러리 가득 퍼지는 시가의 향기, 페더빌딩


페더빌딩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건물 곳곳에는 유수의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곳에 시가 바가 들어섰다. 흡연자가 아니더라도, 시가라는 것의 매력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들다. 센트럴에는 유명한 시가 상점이 세 군대가 있는데 그중 페더빌딩에 위치한 ‘Red Chamber'는 수준 높은 시가 바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어둡지만 클래식한 실내, 조용히 깔리는 재즈 음악, 종류별로 구비된 시가와 고급스러운 악세서리들의 향연. 들어가기 어려워 보이지만, 방문객에게 ’웰컴‘을 선사하며 실컷 구경하게 해 준다. 이쯤 되면 시가의 맛이 궁금해지는데 소파자리에 홀로 앉아 아무 말 없이 롱 애쉬를 만들어내는 중년남성을 보고 생각한다. 아아, 그림을 보는 것만큼 시가 또한 ’침묵의 미학‘이 있는 것이겠구나. 쌉싸름하게 퍼지는 시가 향은 페더빌딩 미술관에 묘한 정취를 불어넣기 시작한다. 시가바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패더빌딩엔 시가향이 난다.



올드 타운 센트럴을 장식하는 비밀스런 곳들


언젠가부터 홍콩 관광청은 센트럴에 ‘올드 타운’이라는 부재를 붙여 관광특구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벽화가 있는 곳이나 특이한 상점, 갤러리 등이다. 대표적인 예술 특구인 PMQ는 건물 가득 들어찬 예술가들의 공방과 샵들이 매력적이지만, 진짜 매력은 따로 있다. 1970년대 홍콩 대중식당을 표방한 ‘Tai Lung Fung’인데 ‘올드 타운’이라는 명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인 것이다.


특히 문 앞에서는 홍콩 전통 간식을 팔고 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달고나 혹은 어릴 적 먹었던 불량식품 같은 것이다. 추억을 자극하는 소품들, 어디에서 찍어도 그림이 되는 셋트장 같은 곳에서, 가만히 옛 청춘남녀의 데이트를 상상해본다.



태평산 거리는 센트럴에서 홀로 운치 있는 곳이다. 사당이나 전통 종교 물품을 파는 샵들이 있다. 근처에는 홍콩 의료 박물관이 있는데 옛날 의술에 대해 알아보기도 전에 고풍스러운 건물에 매료된다. 나무로 된 약장과 실내 분위기는, 그 옛날 동양예술의 우아함을 엿보게 한다.



센트럴의 두 얼굴, 바로 일요일에 볼 수 있다.


필리핀 가정부를 둔 가정은 홍콩에서 흔하다. 특별히 부유하거나 넓은 집에 거주하지 않는다 해도 가정부를 두는 경우가 있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할 어린아이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월 40만원 내외로 입주가정부를 둘 수 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계도 간혹 있다.


가정부를 부린다고 해서 방이 네다섯개나 되는 큰 아파트에 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억대 연봉의 가족도, 20평 내외의 공간에 사는 경우가 많다. 주말에는 가족들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가정부는 나가줘야 한다. 그들은 특별히 돈을 쓰면서 여가를 보낼 수없는 처지라 대부분 길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 싸온 필리핀식 도시락을 나눠먹고, 자기들끼리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춘다.



필리핀 가정부들은 홍콩 내에서 마치 또 다른 소수민족을 형성한 듯하다. 언젠가 센트럴 쇼핑몰 근처에서 이들이 모여 마이크를 들고 시끄럽게 환호하는 것을 봤다. 알고 보니 가정부들 사이에서 미인대회 비슷한 것을 열고 있었다.



이들은 쉽게 모이고 또 해산된다. 더러는 돗자리를 깔고 누워 아예 피크닉을 즐기기도 한다. 비록 노동을 위해 홍콩에 왔을지라도, 이들의 얼굴에는 그늘이나 서글픔이 하나도 없다. 길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감췄다. 여전히 홍콩 사람들은 필리핀 가정부들과의 암묵적인 룰과 선을 유지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우체국에서, 양조위의 넘버 663을 발견했다


663, 양조위의 경찰 넘버


양조위는 ‘중경삼림’에서 지독히도 매력적인 경찰이다. 경찰넘버 663인 그는 동료에게 무전기를 할 때마다 이름 대신 숫자를 말한다. 그는 센트럴 밤거리를 지키며 돌아다니다가, 출출할때에 소호 시장통 샌드위치 가게에 와서 치킨 샐러드를 산다. 센트럴에서는 663같은 경찰이 흔하게 돌아다닌다. 물론 양조위의 얼굴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허리춤에 총을 가득 차고 무표정으로 거리를 살피는 그들에게서 양조위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란콰이퐁 근처도 경찰들이 수시로 단속을 나오는 곳이다. 악명 높은 란콰이퐁은 누구에겐 홍콩여행 최고의 추억을, 누구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홍콩 밤 문화의 절정이라고 칭해지기에는, 작은 골목 하나가 전부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넘어가면 란콰이퐁은 사람들로 넘친다. 이미 취한 사람들, 취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란콰이퐁을 체크인하러 온 관광객들이다. 의외로 홍콩 로컬인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조금 더 프라이빗한 공간인 ‘세라비 Ce la vi'나 ’볼라 Volar' 등을 찾기 때문이다.



란콰이퐁 거리에 있는 펍 들에는 흑인 직원들이 보디가드 겸 호객을 도맡아 하고 있다. 때때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유리컵을 깨던 유럽손님을 가볍게 한 손으로 들어 길 밖에 살포시 놓아두는 흑인 직원을 볼 수도 있다. 해피아워라는 특권으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바 안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는 곳도 있다. 다만 테이블 밖에 앉고 싶다면 작은 의자와 언덕 위에 위태로이 걸쳐진 테이블은 감수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몽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