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일기
홍콩을 생각하면 몰려드는 거대한 이미지들. 그건 어느 오래된 단편영화 같기도 하고, 미숙한 바느질로 엮어놓은 천쪼가리 같기도 하다.
사자성어를 영어로 풀이해 놓은 작은 책의 페이지, 코카콜라 박스를 뒤집어 식탁으로 쓰는 사람들, 빙글빙글 손잡이를 돌려 열어야 하는 빨간 택시와 창문으로 보이는 금빛 빌딩들, 맨손으로 고기를 다듬는 피투성이의 정육점 할아버지, 그 옆을 슬로우모션처럼 지나가는 하이힐의 홍콩 미인, 크롭티를 입은 소녀들과 비좁은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의 물결무늬.
중국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광동어 방언 노래, 수백만톤의 밀크티와 천장까지 쌓여진 딤섬 바구니, 에스컬레이터에 탄 필리핀 가정부와 백인 꼬마아이, 위조지폐를 만들다 잡혀가는 센트럴의 런닝셔츠맨, 토마토가 계단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하필 으스러진 곳은 루부탱 매장 앞, 우유처럼 뽀얀 얼굴을 한 해변마을의 웨이트리스.
이것 말고도 하루 종일 말 할 수 있는 나의 홍콩 감상들. 이 모든 걸 찢고 오리고 붙이고 매달아서 거대한 콜라주를 만들고 싶다.
오래된 엘리베이터, 도시의 미학
급하게 잘 곳이 필요했던 날이 있었다. 계획 없이 무작정 홍콩에 왔던 날이다.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침사추이에 머물려 했는데 하필 주말이라 스위트룸을 제외하고는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건물 5층에 있는 숙소를 찾았다.
입구부터 풍기는 오래된 담배냄새, 빌딩을 지키며 앉아있는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틀고 있었다.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문이 나무로 되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직접 여닫아야 하는 수동 문이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몇 층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올라가는 버튼을 꾹 누르고 조금 기다리면 띵동, 하며 덜컹 하고 설 뿐이다. 문을 열면 손으로 열 수 있는 빈약한 나무문이 하나 더 보인다. 족히 30년은 되어 보이는 엘리베이터에는 꾹꾹 누르는 타자기 버튼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는데, 숫자가 다 지워졌기 때문에 눈치껏 5층으로 보이는 다섯 번째 버튼을 누른다. 그러다 또 덜컹 하고 서면 도착이다.
다음날 내 숙소를 찾아온 홍콩친구는 "이런 엘리베이터 처음 봤어!"라며 나보다 더 외국인처럼 셔터를 눌러댔다. 홍콩에서도 이런 엘리베이터는 이제 보기 힘들다고 했다.
외국인의 도시
숙소 내부에는 필리핀계 직원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창문 하나 제대로 없는 방은 답답함을 유발했다. 그러나 이내 찾아든 생각,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어쩔 수 없나보다. 고급 호텔이 줄 수 없는 이런 '불안한' 느낌이 꼭 나를 영화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만든다. 한껏 거드름 피우면서 복도를 지나다니고 또 사진 셔터들을 눌러내며 만족감을 느꼈다.
감기기운이 있었다. 그 옛날 광동지역의 '십전방' 선생의 비법이 담겼다는 홍콩 전통 감기약 'Min jiom pei pa koa'를 입에 털어 넣고 곧바로 잠들었다. 드럭 스토어에 가면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약이다.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분위기를 즐겼다. 어쩌면 '나 이런 경험도 했다'하며 잘난 척 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다시 찬찬히 보니 침구도 편안하고, 좁은 화장실도 꾀 쓸만 하다. 언젠가 너무나 지쳐 창밖을 볼 힘도 없을 때, 사진 속 왕페이와 양조위의 눈빛이 나를 구원해 주겠지, 하고 가져온 사진들을 꺼냈다. 감기 때문에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양조위가 거닐었을 법 한 거리를 찾기 위해 또 한 번 기운을 내서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