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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Jun 07. 2018

첫사랑

홍콩에서 영화를 기억하는 방법


홍콩의 밤은 ‘첫사랑’을 닮았다. 아련하게 퍼지는 불빛, 손에 닿을 듯 뻗어 나와 있지만 결코 닿지 않는 간판들. 알 수 없는 언어들과 찾을 수 없는 길. 그러나 어느 높은 곳에 도달했을 때에 만나는 환희. 홍콩의 밤거리에, 첫 사랑을 그려낸 홍콩 영화의 무드가 아직도 살아있다. 홍콩 어느 거리 위에 있는, 첫사랑같은 작은 스팟들을 소개한다.

     


거리에서 첨밀밀을 기억하다


영화에서 첫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잔인하다. 문제될 것 하나 없는 허탈한 이유로 어긋나거나, 전쟁과 데모 같은 일로 헤어지거나, 어쩔 땐 한쪽이 세상을 떠나버리며 '억지로' 이별하게 된다. 우리가 <첨밀밀>을 기억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는 희망을 영화 말미에 심어 놓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여명과 장만옥이 뉴욕의 한 레코드점 앞에서 마주쳤을 때에, 지난 이야기는 모두 녹아버리고 다시 ‘달콤한 비밀’ 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첫사랑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이도 있다. 여명의 고모인데, 딱 한번 홍콩을 방문해 자신과 시간을 보냈던 할리우드 스타 윌리엄 홀든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의 사진과 페닌슐라 호텔에서 먹었던 식기 세트를 죽기 전 까지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랑은 너무도 지독하여, 오랜 시간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침사추이의 ‘캔톤로드’는 첨밀밀 전체를 떠올리기 좋은 거리다. 여명과 장만옥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던 도로는 지금 화려한 쇼핑가로 변했지만,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았을 때 마음에 잔잔한 멜로디가 떠오른다.


     


몽콕 어느 상가 위에서 바라보는 밤 풍경


몽콕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여행객들이 한번 쯤 들어갔다 나오는 곳일 뿐이다. 그러나 뜻밖의 운치는 바로 건물 위에 있었다. 레이디스 마켓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어느 상가 3, 4층에 위치한 상점을 방문하면 사람 대신 노점상을 덮은 비닐 지붕들이 보인다. 바글거리는 인파를 싹 감춰버린 색색의 비닐 지붕들은 한 폭의 캔버스 같다. 웅성웅성한 목소리도 그 아래 모두 숨었다. 틈틈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시장통에서 겪었던 두통은 금새 가신다. 이내 몽콕의 밤거리는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진정으로 알게 되는 환상적인 스팟으로 기억된다.

     


레이저 쇼가 끝나버린 구룡베이의 밤


한 때 홍콩여행의 목적으로까지 꼽혔던 침사추이 구룡베이의 야경쇼는 여전히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음악에 맞춰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춤을 추고, 그 앞에는 빨간 돛대를 단 배들이 유유히 지나간다. 불이 다 꺼지기 시작하는 열시 이후에야 사람들이 좀 빠지기 시작하는데, 이때야말로 구룡베이를 걷기 가장 좋은 시점이다. 짭조름한 물 냄새를 맡으면서 끝에서 끝까지 걷다보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홍콩의 젊은 커플들과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노점상의 사람들만 남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더 늦어지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곳에 오직 철썩, 철썩대는 물소리만 희미하게 남는다. 도로를 향해 나가면 더욱 한적하다. 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침사추이 골목 곳곳은 놀랄만큼 어둡고 조용하다.


그러다 오스틴 스트리트의 웨딩드레스 가게 앞을 지나갈 때면 ‘천장지구’의 유덕화가 떠오른다. 그는 애인을 위해 드레스 샵 유리창을 깬다. 드레스를 입은 애인을 뒤로하고 자신은 오토바이를 탄 채 멀리멀리 떠난다. 그의 선택이 내일 어떤일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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