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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May 28. 2018

야자수

홍콩의 작은 해변들

     


야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해먹 아래에서의 여유를 동경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많은 해변과 휴양지가 있지만, 홍콩의 좁은 도심에서 그런 여유를 누린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그러나 아주 조용히 숨어서 관광객 모르게 살랑거리는 야자수 나무들이 있다. 그것을 쟁취하는 것은, 태양열 아래 찌들었던 몸 위로 샤워 같은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 그런 해변의 풍경을 맞이한다는 것은, 도시의 멀미 중에 만나게 되는 산소호흡기 같은 것이다.



<툰문의 보석, 골드코스트 비치>


골드코스트는 평화롭다.

호객행위도, 관광객도, 네온사인 간판도 없다.


홍콩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가 툰문이다. 이름처럼 금빛으로 물든 골트코스트, 그리고 금빛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피아짜. 이 두 개의 가치가 툰문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툰문은 공항에서 멀지 않지만 딱히 편리한 교통편이 있는 게 아니라 관광객의 발길은 별로 없다.



홍콩은 아주 작은 나라이며 모든 것이 비슷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해변만큼은 뚜렷이 구분된다. 유명한 관광지의 해변과 다른 툰문의 골드코스트는 ‘여유로움’의 상징이다. 야자수가 있는 주택가엔 조깅이나 레포츠를 즐기는 여유로운 주민들이 산다.

툰문에 방문하는 이들은 ‘골드코스트 호텔’에 묵는 경우가 많다. 도심 내 고급 호텔보다 규모가 크다.


골드코스트 호텔 내 수영장
골드코스트 호텔, 투숙객이 아니어도 둘러볼 수 있다


툰문을 찾아가는 방법 중 하나는, 골드코스트 호텔의 유료 셔틀버스를 타는 것이다. 셔틀버스가 침사추이 버스 터미널에 온다. 매 시간 정각마다 출발하고, 또 그 버스를 타면 침사추이로 되돌아온다. 골드코스트 호텔의 야외수영장 방향으로 나가면 넓은 잔디밭과 요트들이 정박한 하버뷰를 바로 볼 수 있다.

툰문의 피아짜


하버뷰의 풍경은 툰문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 하다. 누군가 나에게 빅토리아 피크 야경을 보겠느냐, 툰문의 하버뷰를 보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무조건 툰문이다. 호텔 밖으로 나가면 ‘피아짜’라는 간판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이탈리아의 휴양지를 만나게 된다.


맥도날드 창가자리에서


홍콩에서 가장 환상적인 ‘맥도날드 뷰’


이 곳은 이탈리아 피아짜를 본 따 만든 곳인데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인 이국적 건물이다. 그 안에 들어선 각종 식당, 슈퍼마켓, 미용실, 드럭스토어 등 편의시설이 들어차 있다. 피아짜 입구에서 하버뷰를 바라본다면, 툰문 방문이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푸르고 깨끗한 물 위에 눈부시게 정박한 요트들, 곳곳에 있는 야자수와 큰 꽃나무들, 아치형태의 건물들이 내어주는 정취들. 유럽 어느 아름다운 항구마을에 온 기분마저 든다. 피아짜에는 좋은 뷰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지만, 맥도날드의 뷰 만큼 감동이 있지는 않다. 단지 6홍콩달러 정도의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도, 이토록 감동적인 하버뷰 전망을 볼 수 있다니. 이것은 좁고 비싼 도심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행운과도 같았다.

     


<그들만의 리그, 디스커버리베이>


디스커버리베이는 완전히 인공적이다. 하지만 그 인공미 안이 얼마나 오밀조밀 평화로워 보이는지, 자연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홍콩 방문객에게 디스커버리베이 방문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인구밀도의 해방감, 친환경의 쾌적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는 매연이 없다. 친환경 버스가 다니기 때문이다. 길을 물어보고 찾아가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많은 안내원들이 수시로 돌아다닌다. 잘 조성된 해변도시와 실패할 일 없는 서양 레스토랑들, 안전함을 보장하는 작은 도시 안에서의 레고 같은 생활들. 디스커버리의베이의 정체다.


디스커버리베이


디스커버리베이에서는, 좁은 집에서 빨래를 바깥에 널어두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본다. 고액의 연봉으로 스카우트되어 온 홍콩 금융가의 외국인들, 그들을 위해 친환경으로 돌아가는 도시를 본다. 세상은 이들에게 어떤 ‘특권’을 주었기에, 이리도 동떨어진 천국에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동남아시아계 가정부들은 서양 아이들의 얼굴이 탈 까봐 우산을 받치고 따라다닌다. 이들은 수영, 테니스, 승마 등을 배우는데 디스커버리베이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가장 인기 있는 해변의 펍, 헤밍웨이


디스커버리베이 해변가에는 여러 펍과 레스토랑이 있다. 뷰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야외 자리가 인기인데 5시 무렵부터 서양인 입주민들로 북적이는 곳은 헤밍웨이다. 간단한 식사와 맥주 등을 즐기는 곳이다. 디스커버리베이의 물가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해피 먼데이’라는 것을 운영하며 월요일엔 무조건 1+1이라는 배려를 실천한다.


헤밍웨이 바 역시 이런 장점 때문에 월요일에 가장 붐빈다. 디스커버리베이 해변은 밤이 되면 반짝인다. 다리 위에 조명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광동어 소리보다는 영어가 대부분인 이 곳에서 이국적 정취를 한껏 느끼다가, 문득 서러움도 느꼈다. 도시의 진짜 홍콩인들이 그리워졌다.



탕웨이의 추억, 리펄스베이


리펄스베이는 무엇 때문에 유명해졌을까? 풍수지리에 맞춰 용이 지나가는 자리를 뚫어놓은 값비싼 아파트 때문일까. 혹은 홍콩에서는 드문 해변가 마을의 매력 때문일까. 어쩌면 ‘더 베란다’라는 환상적인 카페 때문일 수 도 있겠다. 더 베란다는 악명 높은 디스커버리베이 맨션 1층에 있다.


그 곳으로 오르기 위한 계단과 맨션 앞 분수대, 야자수와 바다 풍경은 이 곳이 ‘특권층’을 위한 맨션이라는 인상을 준다. 입구에 놓인 다소 클래식한 인상의 하얀 건물이 ‘더 베란다’인데, 탕웨이와 양조위가 영화 ‘색 계’에서 분위기를 잡기 위해 왔던 장소다. 아득하고 높은 천장, 1930년 어느 격조 있는 부부가 찾았을 법 한 실내 인테리어가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하고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하얀 팬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고, 그 미약한 소리는 클래식 음악과 어울리는 중이었다. 맨 안쪽에 위치한 자리에는 리펄스베이 맨션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실내에는 멋스러움이 가득할 뿐 아니라 모두들 비싼 메뉴를 즐기고 있었기에, 고작 50달러 정도의 아이스커피를 시킨 것이 멋쩍어졌다. 에프터눈티가 유명하긴 하지만,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화장실 문에는 치파오를 입은 여인의 그림이 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서비스는 ‘더 베란다’의 특징이다. 유니폼을 입고 하루 종일 화장실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화장실 메이드는 팔 위에 수건을 걸고 있다. 손님의 기척이 느껴지면 문을 열어주고, 손을 씻을 물을 틀어주고 또 닦을만한 수건을 건네준다. 화장실 내부마저 클래식하게 꾸몄고, 변기의 물을 내리는 시스템 조차 옛 분위기를 재현했다. 나무 막대기를 손으로 내리면 나무 통 안에 있는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탕웨이처럼 치파오를 입고 오세요. 여긴 홍콩에서 가장 클래식한 곳이거든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화장실로 가는 길, 리펄스베이 맨션의 다른 공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서 깊은 오래된 도서관 풍경이나 아름답게 조성된 쇼핑공간이 떠올랐다. 이러한 맨션에 거주한다는 것, 눈을 뜨면 리펄스베이 바닷가의 풍경과 특별한 서비스가 넘쳐난다는 것은 홍콩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고마웠던 의무실

이 예쁜 도시들에서는

‘다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리펄스베이 바닷가를 걷다가, 조개껍질 같은 것이 샌들 안으로 들어가 발을 베었다. 음식점이 있는 상가 쪽으로 걸어가는데 조그마한 빨간 십자가 간판이 보인다. 의무실 안에는 수영복을 입은 채 검게 그을린 피부를 한 구조요원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계란과 튀긴 고기가 있는 도시락이었다.


의무실에 앉아 소독과 연고, 밴드붙이기를 끝낸 나는 문 바깥으로 보이는 리펄스베이 바다의 풍경을 바라봤다. 파도소리,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 소독약 냄새와 약병들. 나는 약이 마를 때 까지 앉아있으면서, 잠시 동안 어느 청춘영화 한 장면과 같은 환상을 봤다. 학교 의무실 장면이 나올 때 느껴지던 뽀얗고 나른한 화면, 조용한 실내 분위기가 만드는 차분함.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리펄스베이에서 오직 의무실만은 시간이 멈춰있었다.


사진을 찍고 다니느라 손톱이 이리저리 깨져, 스탠리베이에 있는 네일샵에 들렀다. 그때 다섯 살, 여덟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두 자매가 들어왔다. 옆에는 필리핀 가정부가 함께였다.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네일샵의 사장부터 온 직원은 자매에게 집중했다. 아이들은 채 자라지도 않아 보이는 작은 발톱에 페디큐어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그동안 직원들은 쉴 새 없이 자매들의 기분을 맞춰주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틀어주고, 간식을 가져다줬다.


문 앞 간이의자에서 기다리던 필리핀 가정부와, 끝나기 직전 네일샵으로 들어왔던 운전 기사, 그리고 90도로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빠이빠이’라고 하던 공주님들을 보며 약간은 서글픈 느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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