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법
미국은 이방인들의 천국이다.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이방인이 있다. 특히 뉴욕에서는 ‘순수 미국 혈통’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나도 이방인이다. 아직 미국에 대해 ‘내 터전’이라고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필 코로나 사태 때 이민을 와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겪는 이방인이다.
과거의 미국은 ‘드림’이 가능하고 ‘선진’을 목격하는 곳이었다지만 요 몇 년 새 내가 경험한 미국은 '물음표'였다.
거의 매주 발생하는 듯 한 총기 사고, 인종차별, 묻지 마 폭행 사망 사건, 분유 대란 식품대란,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국내선 비행기, 병원비 폭탄, 우편물 분실 등 커다란 사건부터 작은 일상 문제까지 다양한 악몽을 경험하고 있다.
총기 문제가 가장 공포다. 앞으로 미국에 계속 살아야 하나를 고민해야 할 정도다. 초등학교, 길거리, 상점 같은 곳에서 총기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총기’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공부를 하기 전에 ‘총을 들고 온 사람은 총에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배우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미국인들 절반쯤은 그것에 슬퍼하기보다는 ‘총을 더 사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시민권자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아닌 가장 말단의 이민자인 내가 이런 걱정에 대해 어떤 해결책도 강구할 수 없다는 게 슬플 뿐이다.
이런 일들이 매일 차곡차곡 몸에 쌓이다 보면, 두려움과 슬픔 답답함과 분노가 일상을 잠식한다. 거기다가 세금, 보험료, 유틸리티 요금, 높은 물가, 느린 시스템 같은 일상 문제들부터 이민자의 사회 진입 어려움, 불투명한 미래, 간편한 생활의 어려움, 향수병 같은 것들이 겹치다 보니 ‘미국에 계속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표를 띄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언제 까질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살 수는 없다. 한인타운에만 숨어 근근하게 인생을 유지하는 이름 없는 이방인이 아니라, 미국에 제대로 적응해 속해 보고 싶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만난 따뜻한 이방인들을 떠올린다. 나에게 용기를 주는, 미국에 사는 이웃들 말이다. 남들보다 더디고, 어렵고, 힘겨운 이방인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는 결국 똑같은 이방인들 아닐까. 나보다 일찍 '잘 정착한' 이방인 선배이고, 생각보다 '잘 사는' 이민자 출신 사회 구성원들 말이다.
때때로 커다란 성공을 한 이민자들을 보게 된다. 케이팝이나 케이 컬처가 성공을 해 우리들의 위상을 높여준다는 뉴스도 본다. 이민자이지만 미국 사회에 커다란 존재감을 뿜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결국 내 옆에서 나와 같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 '평범한 이방인'이 나에겐 가장 큰 힘이 된다.
내가 미국에서 살아가다 만난 셰리스, 벤자민, 제시카, 슈, 소피아 같은 친구들, 그러니까 모두 영어 이름을 쓰고 있지만 원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나에겐 큰 영감과 힘이 되었다. 그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본인'으로서 타국에서 사는 것이었다. 다만 적극적으로, 다소 열심히, 미래를 철저히 믿으며.
이런 친구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미국 생활 중에 불만이나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했는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자구책을 통해 건전히 해소하는 것이었다. 가령 총기사고에 대해 두렵고 화가 난다면 '열받는다' '못살겠다'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작지만 반대 연대에 대한 기부활동을 하거나 온라인 운동 참여를 하면서 정당한 의견 피력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시스템에 화가 난다면 '젠장 내가 외국인이라 무시당했어' '여기서 못 살겠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다시 시도해보거나 정당한 컴플레인을 제기하며 극복해가는 것이다. 누군가 차별의 눈길을 보내는 것 같다면, 오히려 먼저 미소를 보내고 당당하게 친절을 보여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 적절히 순응하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적극 알리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존감이다.
남미계 친구인 셰리스가 보여준 사교성과 포용력,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상대방에 대해 존중하려는 태도는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홍콩계 미국인 친구의 여자 친구였는데 (지금은 헤어졌다) 나에게 많은 용기를 줬다. 대학교 교직원인 그녀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일부 미국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또 그런 것에 목소리를 높이는데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그간 내가 편견을 가졌던 일명 '게토'와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또 정당한 컴플레인과 권리 주장에 대해 명확히 알려준 친구기도 하다. 푸들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커다란 귀걸이를 한 그녀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옆집 친구 벤자민과 그 친구들이 보여준 자신감과 자존감도 인상적이었다. 벤자민은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인데, 고작 5년도 안 된 시간에 미국에 완벽히 적응한 친구였다.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 영어 발음에, 매콤하면서도 특이한 아프리카 음식을 고집하는 입맛이지만 내가 본 가장 사교성이 넘치는 친구다. 매주 한 번씩 하는 파티에는 아프리카 음악과 저들만의 언어가 가득하지만 늘 이웃을 초대해 자신들의 문화를 나눈다. 백인들과 이시안들은 벤자민의 파티에서 자연스레 서로의 문화를 나눈다. 굳이 '미국 사회'에 진입하려고 '미국스러운' 것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인도 이민자였던 제시카가 보여준 따뜻함은 많은 귀감이 되었다. '인도 게토'로 유명한 뉴욕 자메이카 지역에서 지하철이 고장 난 날, 나는 어떻게 할 줄을 몰라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작은 체구의 인도 소녀 제시카가 나를 도와줬다. 제시카는 인도인계와 가이니즈계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을 완벽히 깨 줬다. 부지런하고, 학구적이며, 남들에게 친절하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였다. 직장생활 외에도 긍정적 삶을 나누는 인문학 모임에서 리더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각자 멕시코, 중국, 홍콩, 독일, 인도네시아에서 와 어떠한 이유로 이곳에 정착해 사는 친구들을 만났다. 늘 밖으로 나가고, 거침없이 도전하며, 어려울 지라도 인상 쓰지 말고 한번 더 용기 있게 나가보는 친구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미국은 다인종 국가이지만, 그만큼 편견에 빠지기도 쉽다. 평생 서로 오해하고 배척하기 쉽다. 일종의 '인도인들은 이렇더라' '흑인들은 꼭 이러더라' '멕시코 사람들은 꼭 이래' '백인들 항상 그래' '중국인은' '일본인은' '동남아 사람들은' '유럽인들은' 같은 일종의 공식들이 있다. 여기에 꼭 따라오는 말은 '한국인은 안 그래'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시선에 과연 한국인들은 완벽하게 다를까? 그들도 저들끼리는 '한국 사람은 이게 별로더라' '한국인은 꼭 이러이러하더라'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른다. 만일 편견에 사로잡혀 남을 판단하고 비웃는다면, 우리도 그런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나는 미국에 산다. 미국은 때때로 어렵고 화가 나고 이해가 안 된다. 그럼에도 미국은 나에게 남다른 경험을 주고, 깨달음을 전해준다. 내가 이곳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엔 '잘' 살고 싶다. 고인 물 안에서 우리들끼리 노는 잉어 말고, 차라리 큰 바다에서 수많은 것들과 함께 떠다니는 플랑크톤이고 싶다. 나는 이방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