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티아고 순례길(포르투갈길- 2일 차 to 라돈델라

진짜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가

by ND

2일 차의 아침이 되었다.

숙소에 마련된 조식을 간단히 먹고 준비해 나왔다.

7시쯤 나왔는데 아직 어두웠다

정말 어제 몸 상태로는 걸을 수 있을까!?

엄청난 고민을 했는데 아침이 되니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견뎌준 내 몸에게 감사하다고 느꼈다.


맨날 잔병치레에 아픈 몸뚱이다.

군대에서 얻은 허리디스크, 평발, 안 좋은 시력으로 라식, 역류성 식도염(지금은 완치), 만성 비염과 그로 인한 축농증으로 수술도 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건강에 대한 중요성이 새삼 느껴진다.

길에 나오니 앞서가는 부부카미노가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인다.

이 부부는 오후까지 앞서가며 뒤서가며 계속 만났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을 건너니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바닥에 저렇게 표현을 해놓은 것을 보니 참 심플했다.

유럽에 오면 늘 느끼는 점이 국경을 넘을 때 그냥 건너간다는 점이다. 휴전국가에 사는 사람으로서 참 부럽다.

스페인 투이라는 도시로 들어왔다. 스페인에 오니

뭔가 풍경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언어도 다르고 분위기도 조금 더 도시적인 느낌이었다.

점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틀 무렵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고, 새로운 시작의 느낌이 너무 좋다.

어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오르막이 보이면 너무 무섭다. 근데 걷다 보니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무서워졌다. 내리막이 무릎에 진짜 안 좋은 거 같다.

투이는 확실히 더 건물도 많고 인구가 많은 도시 같았다. 순례객들도 대부분 여기에 묵은 거 같다.

등산용품 가게가 있길래 들렸는데 짐이 될 거 같아 그냥 나왔다. (이때 등산 스틱을 샀어야 했다)

아름다운 골목길들을 지날 때 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는 언제 들어도 항상 좋다.

유럽의 골목길은 양쪽 건물들이 한 폭의 액자가 되어 사잇길의 풍경을 그림처럼 만들어준다.

골목을 돌 때마다 비슷하지만 새로운 풍경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해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스페인 길을 걷다 보니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지리산, 설악산 종주, 동해안 둘레길 종주 등 국내의 아름다운 길들을 다음 휴가 때 걷기로 마음먹었다.

마을을 지나가자 점차 숲길이 나왔다.

발이 아팠지만 다음 숙소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 힘들게 걸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순례객들을 제치며 경쟁하듯 빠르게 걸었다.

한국인들은 게임 ‘동물의 숲’도 빡시게 한다던데 나도 여기 와서 경쟁하듯 걸으려고만 하는 거 같다...

숲길들을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덧 산티아고까지 116km가 남았다.

가다 보니 도로길을 따라서도 걸었다. 확실히 차가 옆에서 쌩쌩 다니고, 매연이 심해서 숲길이 좋다.

이어서 다시 나오는 숲길, 이때 비가 내릴 거 같아서 겁먹었는데 다행히 아주 조금 내리고 말았다.


확실히 어제보다 순례객들을 많이 만났다.

순례길이 100킬로미터부터 인정을 해줘서 Tui부터 걷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걷다 보면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을 진짜 많이 본다. 세상 편하게 지내는데 완전 상팔자다.

다시 여러 길들을 지났다. 발바닥의 통증이 너무 심해졌다.

갈림길에서 모든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모두 나의 것이다. 왼쪽길은 6.7킬로의 숲길, 오른쪽은 5,5킬로의 도로길이었다. 나는 발이 아파 조금이라도 적게 걷기 위해 오른쪽 길로 갔다.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무자비한 일자길 거기에 양쪽은 공단들이 있어 매연과 소음이 너무 심했다.

정말 바로 후회했다. 아까 갈림길에 왼쪽길로 가라고 수많은 화살표들이 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걸어야지...

지나가다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 앉아 쉬는데 나이가 80은 넘어 보이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젊은 놈이 무슨 체력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듯 쓱 미소 짓고 가셨다. 나도 그만 쉬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갔지만 저 멀리 앞서 가셨다. 평소에 좀 많이 걸어야겠다.

이어서 도착한 마을에서 햄버거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빅맥 수제버거 버전 느낌이었다.

깔끔하게 다 먹고 나니 발과 무릎의 통증이 너무 심해졌다. 과연 다 걸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들었다.

결국 길을 가다 가게에서 등산스틱을 샀다.

아침에 오는 길에 나무로 만든 등산스틱을 누가 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었는데 그걸 주울걸 엄청 후회됐다. (나중에 가다 보니 젊은 외국인 남자애가 그 마법사 지팡이 같은 등산스틱을 들고 유유히 앞서갔다)

발이 너무 아팠지만 등산스틱에 의존해서 꾸역꾸역 걸어갔다. 중간에 버스나 기차, 택시 등도 찾아봤는데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저 멀리 앞서가는 그 마법사 지팡이의 주인공. 이 친구가 빠르긴 했는데 중간에 쉬다 걷다 하다 보니 나중에는 거의 같이 걷게 되었다.

길을 걷다 중간에 비가 조금 오다 말다 했었다. 우비를 쓸까 말까, 우산을 필까 말까 엄청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전에 드라마촬영 중에 우천으로 인해 촬영을 중단할지 말지 엄청 고민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비용적인 문제, 촬영 마감일의 문제들로 중압감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지 말지만 고민하면 되니 새삼 편하게 느껴졌다.

이제 마을을 가기 전 언덕배기 정상까지 왔다.

아무리 스틱이 있었지만 발의 통증은 너무 심해졌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노래라도 들으면 좀 나을 것 같아. 옛날 노래 랜덤 재생을 했는데 노라조의 ‘형’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노래 가사들이 하나하나 너무 잘 들렸다. 원래도 좋아했던 노랜데 가사가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지는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 조금 나왔다. 노래를 들으며 눈물이 나는 모습이 참으로 웃펐다. 역시 모든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느껴지는 게 다른 것 같다. 마치 산정상에서 컵라면을 먹으면 맛이 두 배가 되듯이.

마지막에 진짜 너무 힘들었다. 택시를 부르고 싶어도 택시가 없었다. 아직도 4킬로가 넘게 남았는데 진짜 기어가듯 걸어갔다.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돼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진짜 발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래도 저녁을 먹어야 하니 등산스틱을 짚어가며 슈퍼에 들어 저녁을 사 왔다. 도저히 밖에서 먹을 힘이 없었다.

파스타 샐러드와 하몽 그리고 맥주를 먹었다. 좀처럼 맥주를 남겨본 적이 없는데 한 캔정도는 못 마셨다.

오늘은 푹 자야 되는데 내일이 벌써부터 두렵다.

숙소 창밖을 보니 10/31일 할로윈 데이라 밖이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얼른 자야겠다.

오늘도 33.79km를 걸었다.

너무 아프지만 한편으론 뿌듯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