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기차를 탔다
3일 차의 아침이 밝았다.
발에 물집이 한 6개는 났다. 사실 어제 봤는데 어떻게 조치할 힘도 없어 그냥 잤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을 때까지 두는 게 좋다는 인터넷 글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끄고 잤다. 후회는 내일의 나에게...
오늘의 목표는 칼데스 데 레이스라는
동네로 41.2km를 가야 한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워놨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무식한 채 용감하면 몸이 개고생 한다. 옛날에 대학생 때 들었던 건축답사동아리 ‘머나몸고’가 생각났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40킬로는 못 가ㅠ
결국 기차를 예매했다. 양심에 찔려 오늘의 목표지점의 중간까지만 기차를 타고 내려서 걷는 게 목표다. 그래도 24km 정도 걸어야 한다.
역에 도착하니 한산했다. 걸어서 5시간 거리가 기차로는 18분이면 간다.
18분의 기차여행 후 내렸다.
도착하니 산티아고까지 67km. 갑자기 확 줄었다. 마치 보너스를 받은 느낌. 3유로의 기차값과 양심을 버리고 20km 정도의 거리를 얻어냈다.
폰테베드라라는 도시부터 출발이다.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도시가 커지는 느낌이다.
성당에 들러 크리덴셜 도장도 찍고 조개껍데기도 하나 샀다.
폰테베드라도 건물들이 예뻤다. 맑은 날씨도 한몫했다.
할로윈데이의 흔적들
어제 늦게까지 놀고 오늘은 많이 쉬는 거 같았다.
폰테베드라에서 다음 마을로 넘어가는 다리의 풍경이 근사했다. 강물에 반사된 하늘이 아름답다.
길을 가다 3명의 미국인 할머니를 만나 잠시동안 같이 걸었다. 2년 전에 프랑스 길을 걷고 이번엔 포르투갈 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순례길에 한국인이 왜 그렇게 많냐고 물어보셨다. “한국인은 가톨릭이 많은가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다른 할머니(미국국적이지만 일본인)가 한국에 순례길 관련 티비 프로그램에 많이 나와서 그렇다고 대신 대답해 주셨다. 스페인하숙, 같이 걸을까 등 프로그램들의 영향도 큰 것 같다.
3명의 할머니들은 중간에 나온 다른 갈림길로 가셨다. 이어서 나오는 흙길. 발이 아플 때는 흙길의 소중함을 많이 느낀다. 확실히 돌길이나 아스팔트보다 훨씬 발이 덜 아프다.
24km만 걸으면 된다고 만만히 봤는데 오늘은 물집 때문에 발이 완전 초반부터 너무 아프다.
1,2일 차에는 빠르게 걸으면 1km를 12분 정도에 걸었는데, 오늘은 발이 아파 1km에 15분 정도 걸렸다.
한 시간에 5km를 가다 한 시간에 4km 정도의 속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도 6시간 정도 꼬박 걸어야 했다...
그래도 오늘은 흙길도 많고, 경사가 심하지 않아 조금 다행이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조그마한 마을들이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오늘은 귀여운 고양이들이 많았다.
무서운 물 웅덩이들을 지나 어느덧 산티아고 까지 60km 남았다.
오늘은 숲길들이 많았는데 자전거 라이딩 하시는 분들이 많았었다.
스페인은 포도농장들도 참 많았다. 포르투갈부터 스페인까지 와인이 그래서 유명한가 보다.
간단히 점심을 먹으면서 숙소를 예약했다.
아아가 너무 먹고 싶어 얼음도 달라고 했다.
새삼 한국에 가서 아아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여기는 커피양도 적고, 아아는 스벅에만 있다...
그리고 희소식이 있었다. 숙소를 예약하는데
리뷰에 숙소 근처에 아시안 마트에서 라면을 판다는 것이었다. 빵쪼가리만 먹던 와중에 너무 행복했다.
오늘은 신라면을 꼭 먹어야지
방금 점심을 먹었던 식당의 리뷰를 봤는데, 어떤분께서 바깥에 앉아 있는데 주문을 오랫동안 안 받으러 왔다고 별점을 안 좋게 주신 것을 봤다.
가게에 가보니 외부자리는 가게안에 들어와서 주문해 달라고 쓰여있었다.
외국에 갈 때마다 간단한 인사말과 식당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외국어만 공부해 가도 말하는 재미도 있고 응대해 주시는 분들도 훨씬 친절해진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간단한 회화만 하려고 해도 식당 주인 분들이 경계를 푸시고, 서비스라도 하나 주시려고 하지 않을까?
계속해서 아름다운 흙길이 이어졌고, 발의 물집은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결국 나의 속도에 맞게 걸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첫째 날과 어제만 해도 빠르게 가려고만 했는데 발이 아프고 보니 오늘은 사람들이 다 나를 지나쳐 앞서갔다. 그래도 꾸준히 걷다 보면 앞서 가던 사람이 쉬고, 이어서 내가 쉬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제치고, 제쳐진다.
발의 엄청난 고통 속에 수많은 길들을 지나며 결국 도착하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마을은 사이에 강도 흐르고 예스러운 건물들도 많아 아름다웠다. 노을이 지고 있어서 더 예뻤던 거 같다.
가는 길에 아시안마트에 들러 신라면을 샀다. 살짝 돌아가야 했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너무 깔끔하고 직원분도 친절했다. 물집을 치료할 소독약과 실과 바늘도 빌려주셨다.
샤워를 하고, 같은 방에 묵는 덴마크 남자애와도 얘기를 좀 나누고 드디어 라면을 먹었다.
스페인의 석양을 보며 라면을 먹는데 끝내줬다.
진짜 오랜만에 매운맛과 국물을 먹어서 너무 행복했다. 속 안에 쌓인 빵들이 훅 내려가는 듯했다.
저녁을 먹고 앞으로의 차편들과 숙소를 예약하고 오늘도 내일을 위해 숙면을 취해야겠다.
1,2일 차와 다르게 24km 밖에 못 걸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도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