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살던 딸
작은 딸은 일본 대학으로 진학했다. 일본을 좋아해 외국어고등학교 일본어과에 진학했고 일본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다. 3월 생이지만 일찍 학교에 보내고 싶어 2월로 출생신고를 했더니 19살에 혼자 외국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기숙사는 너무나 좁고 열악해서 자취를 했는데 일본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집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공부밖에 해본 것이 없던 아이가 외국에서 혼자 장을 보고 밥을 해 먹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살아야 한다니.......
입학식 며칠 전,
무척이나 야무지고 단단한 아이지만 아이를 혼자 두고 오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함께 교토역 앞 리무진 터미널에 갔다.
꼬옥 안아주고 차에 올라 창밖을 보니 거짓말처럼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혼자 울고 갔을 아이를 생각하니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학생 때에는 1주일에 5일 정도는 통화를 한 것 같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있던 아이여서 열심히 밥을 해 먹고 다녔고 일상을 공유하며 지냈다.
첫여름방학에 집에 와 있으면서 얼마 지내다가 심심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일본집이 자기 집이라니.....
자신의 물건이 다 있고 일상이 있는 교토 집이 아이의 집이 된 것이다.
교토에 갈 때마다 김치, 잡채, 고사리나물, 동그랑땡, 게장......
아이가 즐겨먹는 음식을 해서 들고 갔다. 교토 곳곳을 함께 다니기도 했지만 저녁을 집에 와서 먹는 날이 많았다. 아이에게 한국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 음식은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은 아이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끈 같았다.
(딸이 좋아했던 교토의 철학의 거리)
동경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한국 음식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그동안 일본음식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음식 냄새가 배면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킬까 봐 이기도 했다. 딸은 완전히 일본 사회의 일원이 되어갔다.
그리고 통화도 뜸해졌다.
입사 때부터 주요 부서의 중요 일을 맡더니 퇴근해 쉴 무렵이라 생각한 시간에도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조용히 “여보세요. 잠깐만.....” 이라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한참 난 후에 “엄마, 아직 회사예요”라고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린 주말에 몰아서 한 시간 정도 통화하게 되었다.
아이의 일상은 내게서 멀어지고 우리의 대화도 겉돌 때도 많아졌다. 직장생활을 하는 자식의 일상을 모두 알 필요는 없지만 점점 대화거리도 줄어들고 주로 아이의 회사 얘기를 듣기만 했다. 남편은 자식의 더 많은 소식을 원했지만, 내가 질문을 잘 못하면 핀잔을 듣기도 했다.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해진 딸에게 간섭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품 안에서 키우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나도 성인 자식의 엄마는 처음이다. 어디까지가 관심이고 어디까지가 간섭인지 명확하지 않다. 얼마 만에 통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도 잘 몰랐다.
얼마 전 친구의 딸이 해외로 몇 개월간 인턴으로 갔는데 얼마 만에 한 번씩 통화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너무나 걱정돼서 매일 전화하니 짜증 낸다고.
내 친구도 그 딸도 다 이해가 간다. 걱정하는 엄마, 걱정하는 엄마를 아는 딸.
멀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리워하던 딸이 10년 만에 돌아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1년에 한두 번 다녀가던 딸이 만약 일본에서 결혼이라도 한다면 1년에 한 번도 오기 힘들 테고 영영 해외동포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 때쯤 한국으로 돌아오며 이직했다.
귀국하면서 독립의 뜻을 내비친 적이 있지만 집에 주저앉혔다. 성인이 되면서 10년이나 일본에서 산 딸은 그곳에서 사회를 배웠기에 좀 생경할 때가 있다. 게다가 일본으로 갈 때 어리던 그 아이가 아니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고 살아온 성인이다. 10년을 혼자 살았고 여행도 혼자 다니는 무척이나 독립적이고 쿨한 성격인 딸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이의 어느 글 속에(우리 딸도 브런치 작가이다.)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좋다는 말을 읽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