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by 희딤

내 마음의 부채로 남겨진 두 가지의 부탁이 있었다. 이제는 영영 들어줄 수 없는 나의 할머니들의 부탁이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의 시어머니, 즉 증조할머니도 함께였다. 첫 번째 부채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증조할머니께서 고구마를 드시며 물 한 컵을 떠 달라고 하셨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심부름을 하기 싫어 아랫방에서 못 들은 척했다. 물론 그 행동 때문에 무슨 큰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날을 생각하면, 평소답지 않던 내 모습을 보고 할머니께서 서운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추측이 남는다. 끝내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를 떠올리면, 그 작은 심부름 하나가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두 번째 부탁은 훨씬 더 무겁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큰 후회이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나를 돌봐주던 주 양육자였고, 나는 고단한 할머니의 삶에 웃음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만큼 우리 사이에는 깊은 애착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할머니는 연로해지셨고,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갔다. 당시 나는 대학교를 다닐 때라 큰 수술할 때도 곁을 지켰고, 병문안을 가서 할머니와 함께 자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왜 변덕을 부렸을까. 할머니 곁에서 잔다고 하고 이부자리까지 깔아두고서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돌아왔다. 당시 남자친구와의 일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던 날로 기억한다. 돌아서는 손녀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민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금 할머니가 계시다면 우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어린 시절의 그 꼬맹이가 이제 할머니를 모실 수 있는 집도 있고, 운전도 할 줄 알고, 무엇보다 스스로 돈을 번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늘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눈물이 난다. 나의 눈물 버튼, 나의 할머니, 오늘 밤에는 꼭 내 꿈에 나와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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