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형, 이러니깐 장수하지

by 킹오황

함께 고시 공부를 했던 스터디원의 말이다.


그 동생은 시험을 항상 전략적으로 준비하여, 시험에 자주 나오거나 나올 것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거기다 딱 시험 문제를 풀 수준까지만 이해하고 넘어갔다. 머리가 좋아서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에 필요한 깊이만큼만 말이다. 그는 그렇게 효율적으로 공부한 결과로 시험 첫 해는 소수점 차이로 떨어졌고, 두 번째 해에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붙었다.


반면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떤 내용이든 시험 문제를 푸는 수준을 넘어 남을 가르쳐줄 수 있을 정도까지 이해해야지만 넘어갈 수 있었다. 스터디를 하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듯 왜 그렇지? 란 의문을 제기했고, 스터디원들은 결국 지쳤던 나머지, 그리고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런 말까지 했던 거 같다. 그렇게 그들이 보기에 비효율적으로 공부했지만 다행히 4년 만에 합격했다. (난 결과가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으니 여전히 공부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웃기게도 인생에서 항상 전력을 다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대학원을 다닐 땐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게임에 빠져 연구실 생활에 불성실했던 나는 매주 있던 랩 세미나에 참석하는 걸 굉장히 두려워했었다. 랩 세미나라는 게 교수님이 일주일 동안 대학원생들이 어떤 연구를 했는지, 교수님이 시킨 걸 제대로 수행했는지 점검하고 앞으로 연구 방향을 논의하는 회의였는데, 일주일 내내 놀았던 나는 할 말이 전혀 없었다.


혹여나 교수님이랑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회의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만 바라봤고, 교수님은 (아마도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도 걸지 않으셨다. 우여곡절 끝에 석사 논문을 쓰고 졸업은 할 수 있었었는데, 그때 나는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앞으로 무엇이든 공부할 일이 있다면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또다시 겪지 않도록 단디 하겠노라고.



이런 다짐은 고시 공부뿐만 아니라 공무원이 되어 업무를 할 때도 계속되었다. 매사 최선을 다해 담당 업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전출하기 전 사업 부처에선 이런 태도가 장점이기도 했지만 단점이 되기도 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 일까지 다 들추어서 살펴보다 보니 이상한 점들이 눈에 보였고, 그 업무에서 손 뗀 지 한참 지난 전임자들(주로 선배)에게 그때 왜 그랬는지 물어보다가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버릇(?)은 고치기 힘들었다. 내 업무를 내가 잘 모르는 일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사업 부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관이 많은 사업을 총괄하다 보면 제한된 시간 안에서 찾아보다 답이 없으면 적당히 넘어가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어떤 상사는 그런 나를 답답해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누군가 나에게 여기보다 감사원이 잘 맞겠다고 한 말이 결국 사업 부처랑 잘 안 맞는 거 같다는 의미이지 않았나 싶다.


이런 완벽주의적 성향인 나는 누구든지 (특히 공무원) 자기 일에 대해 '잘 모르겠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를 싫어한다. 당연히 담당자가 모든 일을 다 알 순 없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알아본 후 연락 주겠다'라고 하는 게 정상인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으니 네가 알아서 찾아보라고 하는 건 용납이 안되더라. 웬만해선 화를 잘 안내는 성격이지만, 몇몇 공무원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를 낸 적도 있었다.


일반화하긴 그렇지만, 내 경험상 공무원은 쉽게 일하려면 정말 쉽게 일할 수 있고, 어렵게 일하려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렵게 일할 수도 있다. 매년 업무가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특성상, 작년에 했던 일을 똑같이 한다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중간 이상 갈 수 있다. 하지만 관행적으로 하던 업무에 대해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찾아보고, 작년에 했던 방식이 맞는지 하나씩 따지기 시작하면 야근에 주말 출근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후자와 같이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어 일을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해오던 것들은 대부분 문제가 없기 때문에, 열심히 한 티가 안 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일부 공무원들이 전자와 같이 일을 하는 것에 이해를 하려고 한다.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랑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는 주무관님들이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나 같은 스타일의 상사와 일하면 분명 힘들어하실 거니 그렇게 말씀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내 업무 방식에 공감하는 주무관을 만나 일 한번 똑바로 해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



keyword
킹오황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공무원 프로필
구독자 1,199
작가의 이전글국립국어원 교육을 받은 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