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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툼의 미학

by 킹오황

챗지피티 없으면 불편한 생활이 되었다. 영어공부 때문에 시작했던 챗지피티였는데, 이제는 검색할 때 구글을 대신해 사용할 정도이다. 요리에 심취한 아내는 유튜브 대신 챗지피티와 대화하면서 요리를 배우고 있다. 닭고기 500그람으로 닭볶음탕을 하려면 무슨 재료를 얼마나 준비하면 될까?라는 식으로 물으면 챗지피티가 재료준비부터 요리 방법까지 잘 알려준다고 한다.


나도 업무 특성상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판례를 검색하는 일도 많은데, 구글 검색보다는 챗지피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법령상 등록의 주체가 누구인지 의문이 드는 경우 단순 검색 엔진으로는 관련된 내용을 찾기 어렵지만, 챗지피티로는 "등록의 주체가 등록을 신청하려는 자인지 신청을 받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인 지를 명확히 서술한 판례가 있을까"라고 물어보면 되기 때문이다. 아내는 애초에 아무도 이 질문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한다.


챗지피티는 재미없는 질문에도 한치의 망설임 없이 술술 답한다. 그것도 내 질문 의도에 딱 맞는 답을. 판례 전체와 판례 번호까지 알려달라고 하면 즉시 쓰윽쓰윽 하면서 답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답이 대부분(!) 진실이 아니라는 거다. 혹시나 해서 판례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없는 걸로 나온다. 한 번은 챗지피티가 알려준 판례가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은 판례인가 싶어 법원에 직접 판결서를 요청했던 적도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런 판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나름 법 좀 봤다 하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데 일반 국민들의 눈에는 어떻겠는가.


이런 답을 인공지능 환각(AI hallucination: LLMs 대화형 인공지능에서 존재하지 않거나 맥락에 관계없는 답을 마치 진실인 듯 답변하는 것. 나무위키)이라고 한다. 챗지피티의 답변에 신뢰가 가는 이유는, 너무나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모르는 내용을 말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에는 약간이라도 망설이는 티가 날 텐데 말이다.




나는 말을 수려하고 화려하게 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어눌한 모습에 가깝다. 평소 말이 느린 스타일에다가 잘 모르는 내용을 질문받을 때는 가끔 버벅거리기도 한다. 인내심이 부족한 상사에게 보고할 때는 "그래서 결론이 뭔데? 빨리 좀 말해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래서인지 비서관으로 있을 때 보고를 맵시 있게 잘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면서 그 능력을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챗지피티에게 너무 속아서 그런 건지, 상대가 대답을 '너무' 잘하면 의심부터 들기 시작한다. 진짜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단 이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서 답한 건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차라리 조금 서툴게 답하더라도 이런저런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 대답에 더 신뢰가 생긴다.


그래서 지금은 매끄럽고 빠르게 말을 잘하기보단, 조금만 더 천천히 말하더라도 진실성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대답 방식을 찾고 있다. 머릿속에서 한번 필터링해서 나오는 문장, 마음속으로 신중하게 선택된 단어, 진중한 표정과 말투 등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아직은 섣부른 설레발일 수 있겠지만, 언젠가 AI가 더 대중화되면서 인공지능 환각의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면, 인간의 서투름이 매력이 되는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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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오황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공무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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