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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의 칠순 여행

by 킹오황

올해 6월이 시어머니의 칠순이다. 다른 방면에선 매우 뛰어나고 흠잡을 거 없는 남편인데, 유독 부모님의 생신에는 각박하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는다.


"엄마가 칠순이라고 뭐 거창한 거 하지 말라네요, 원래 우리 집안은 이런 거 잘 안 챙겨요. 집안마다 가풍이 다르잖아요."


나는 남편의 천연덕스럽게 하는 저 말을 전부 믿을 수가 없었다. 설령 시어머니의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냥 넘어갈 성격이 아니다. 시아버지 칠순 때가 떠오른다. 시아버지는 본인이 칠순 이벤트를 꾸몄다. 먼저, 시누이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을 다 모아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러려고 한복까지 다 맞춰 입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제도에 호텔을 잡아서 시아버지가 생각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불렀다. 시누이 가족과 사돈, 우리 가족, 심지어 우리 부모님까지...


우리는 시아버지가 기획한 행사에 참여한 걸로만 끝낼 수 없어서, 시아버지 칠순 선물도 준비했다. 최고급 안마의자로. 집에 내려가면 거실에 대문짝만 하게 걸려있는 가족사진, 그리고 시아버지 방에 있는 안마의자를 볼 때마다, 하나뿐인 시아버지의 칠순을 참 잘 넘겼구나 싶다. 시어머니 칠순 여행이 샘이 났는지 자꾸만 시아버지는 진짜 칠순은 77세 때 하는 거라고 하고 계신다


반면 시어머니는 다르다. 남편이랑 비슷한 성격이어서 그런 건가, 이벤트를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본인이 절대 계획할 리는 없고, 남편에게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내 몫이다.


고민 끝에 나는 칠순 여행으로 정했다. 남편이 부모님과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아니, 평소에도 효자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불효자였다니.




나는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사정 상 해외로 나가긴 어렵겠고, 제주도로 정했다. 날짜는 시어머니 생신에 맞췄다. 시댁에 내려간 날 슬쩍 내 아이디어를 흘렸다. 제주도로 칠순 여행을 가면 어떻겠냐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놀라면서도 환하게 웃으셨다. 아들이랑 한 번도 여행 간 적 없다는 말도 덧붙이시면서.


다행이었다. 아니 두 분이 저렇게 좋아하시는 거 보니깐 괜히 남편에게 섭섭했다. 부모님이랑 여행 한번 같이 안가고 뭐했냐. 우리 가족은 시시때때로 여행 다니는데 말야.


여행에 필요한 교통편, 숙소, 일정 모든 걸 내가 짰다. 여행 고자인 남편에게 맡겨봐야 결국 내가 다 수정해야 할 거기 때문이었다. 특히 시부모님이 20년 전에 제주도로 여행 가서 중문 하얏트 호텔에 묵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번 숙박 장소도 중문으로 쉽게 정할 수 있었다. 20년 만의 제주도 여행, 콘셉트 괜찮다. 중문 롯데호텔. 1박에 40만 원. 우리 신혼여행은커녕 한 번도 이런 비싼 숙소에서 묵었던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우리도 롯데호텔에서 한번 지내보자 싶었다. 3박 4일 동안 여기만 묵어도 일단 평타 치겠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날씨를 계속 확인했다. 이번 주부터 제주도를 기점으로 장마가 시작된단다. 아우, 왜 이렇게 날씨도 안 도와주냐. 사실, 시아버지는 6월 초에 장마가 올 수 있어서 9월에 가자고 그러셨다. 하지만 나도 한 고집한다. "의미 있는 날짜에 가야 여행도 의미가 있거든요. 9월에 또 가면 되죠." 어쨌든 시어머니 생신이 있을 때 가야 한다고 우겼다. 그랬는데 비 소식이라니. 의기양양해하는 시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른다.




우리는 하루 전날 밤 비행기로 제주도에 갔다. 시부모님은 아침 일찍 오시기 때문에 렌터카를 준비해 공항으로 모시러 갔다. 시부모님은 단체여행만 다녀서 렌터카를 몰고 여행을 하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다. 남편은 이왕 이 모든 공을 나에게 몰아주려고 결심했는지, 렌터카도 내 아이디어라고 말해줬다.


시아버지도 내가 참 운전을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한때 반곡동 매드 레이로 불렸었지만, 이번 여행에선 그런 모습을 들킬 수 없지. 최선을 다해 천천히 움직였다. (물론 며칠 안에 내 운전 습관은 다 뽀록이 났지만)


시어머니가 제주도에 와서 다른 것보다 갈치를 먹어 보고 싶다고 하셨다. 어디 맛집이 좋을까 고민하는데 남편은 곧바로 순살 갈치를 먹고 싶단다. 아무리 가시를 발라먹기 귀찮아하는 사람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순살이라니.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고 시어머니가 맞장구를 치신다. 순살 갈치 좋겠다고. 남편은 맛집이라고 근처의 식당을 찾아서 갔는데,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다. 시어머니는 여행 온 것만으로도 그리 좋으셨는지, 순살 갈치도 참 맛있게 드시는데, 더 맛있는 걸 못 찾아드려서 죄송스러웠다.


셋째 날에 갈치구이집을 갔었다. 기다란 갈치가 통으로 구워져 나오는 건데, 보이는 건 정말 탐스러웠지만 막상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렇지만 4명이 한 상에 둘러앉아 생선 한 마리를 나눠 살을 발라먹는 모습을 보자니 진짜 가족의 모습 같았다. 시아버지는 연신 나보고 진짜 가족이라고 그러셨던 게 가스라이팅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도 이제 여기 가족이야. 남편도, 우리 집에 오면 가족이야.


시부모님과의 여행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식사는 흑돼지 삼겹살이었다. 시어머니가 돼지고기를 못 드시기 때문에 돼지가 아닌 식당을 준비했는데, 시아버지는 제주도에서 흑돼지 안 먹으면 안 된다고 그러신다. 주인공은 시어머니인데 말이다. 근데 또 이게 뭔가. 시어머니도 밖에 나와선 돼지를 드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제주도 와서 돼지고기를 하나도 못 먹을까 봐 여행 전날에 남편과 보쌈을 먹고 왔는데 말이다. 그래서 간 식당. 서비스도 너무 좋았고, 고기도 맛있었고, 함께 마신 와인도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시어머니가 기대 이상으로 고기를 많이 드셔서 다행이다 싶었다. 결국 드시고 싶다고 한 갈치보단 평소 잘 못 드시는 돼지고기가 제주도에선 더 맛있어하신 것 같았다. 미묘한 곳이다.


먹는 거 이야기할 때 롯데호텔 뷔페를 빼먹을 순 없다. 솔직히 1인당 (할인해서) 7만 원 뷔페는 자주 먹을 수 없었기에, 아침은 굶다시피 하고 점심으로 한번 갔다. (참고로 난 간헐적 단식을 한다고 시부모님 앞에서 아침을 평생 안 먹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런 나를 쿨하게 받아들여주신 시부모님이 고맙다. 남편은 이제부터 혼자서 아침 먹으시길 ^^) 음식도 하나하나 고급스러워 보이고 다양했으나, 뷔페는 뷔페일 뿐, 나의 허함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도 기계가 아닌 사람이 만들어주는 카페라테는 대만족이었다.




우리 여행의 콘셉트는 '걸음'이었다. 시부모님은 걷는 걸 좋아하셔서 하루에도 1~2시간은 동네 산책코스를 걸으신다. 우리가 시댁에 내려갈 때마다 항상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말씀하신다. 시댁에서도 우리는 최소 1시간은 걸어야 한다. 그런 분들이 시기에 여행에 오름, 한라산, 올레길, 호텔 주변 산책로 등 다양한 산책 코스를 준비했다. 비가 많이 올까 봐 걱정했지만, 조상신이 도우셨나, 한라산만 빼고는 전부 제대로 걸었다. 성공적이었다.


특히, 롯데호텔부터 파르나스호텔까지 산책로가 정말 아름다웠고, 거기서 바라보는 바다도 숨막힐 정도의 장관이었다. 날씨까지 너무너무 좋아서, 시아버지가 찍은 사진 몇 장들은 예술 작품급이었다. 시아버지께 말씀도 안 드리고 이렇게 올려도 되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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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 끝까지 갔다가 같은 길로 되돌아오긴 좀 심심해서 해변으로 내려와서 걷자고 했다. 내 제안은 신의 한 수였다. 남편은 자꾸만 신 더러워진다고 해변으로 가지 말자 그러더니, 또 내려가서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자꾸 웃으면서 걷는다. 발을 파도에 잠기듯 걸으면서 좋아한다. 좀 전까지 투덜거리는 모습에 짜증이 나려다가도 저런 순진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다 녹는다. 진짜 내가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한라산 영실코스는 많이 아쉬웠다. 올라갈 때도 비가 많이 내려서 걱정이 되었고, 그만큼 준비도 덜 했던 점도 아쉬웠다. 최소한 우의에 등산화라도 가져왔더라면. 그리고 가족들이 전부 안전을 중시 여긴다. 나는 솔직히 좀 위험 애호가인데, 그래서 가끔씩 남편 놀리는 맛이 꽤 상당하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내려가자는 시부모님을 내가 이길 순 없다. 그래. 그 피는 어디 안 가는구나. 인정.




또 생각나는 건 롯데호텔 야외 풀장이었다. 투숙객은 무료였고, 매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공연이 있었다. 대부분은 젊은 사람, 특히 부부와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시부모님께 미리 수영복을 준비하라고 했고, 얼른 수영장에 같이 가고 싶었다. 나도 이 날을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를 해왔던 게 아닌가. 남편은 자꾸만 밍기적 거린다. 결국 못 참고 나와 시부모님과 먼저 풀장에 들어갔다. 하도 안 와서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그제야 나오겠단다.


롯데호텔에서 본전 찾으려면 풀장에서 최대한 오래 있어야 했다. 그만큼 신나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시부모님도 처음엔 자기들이 이 풀장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라고 멋쩍어하시더니, 나중에는 두 분이서 알아서 재미있게 노시더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남편만 신경 쓰면 되는 점도 편했다. 남편이 목디스크가 있어서 요즘 날 들어준 적도 별로 없었는데, 풀장에선 나를 번쩍번쩍 들었다. 조금 설레었다는 것도 남긴다.


실내 수영장도 있었다. 헬스장 옆에 있는 수영장으로 거긴 엔터테인먼트보단 피트니스에 가까운 수영장이었다. 나랑 남편은 그 수영장에서도 수영을 했다. 나보다 몇 번 더 간 남편 말로는 수영하는 사람이 우리 둘 뿐이었단다. 그 정도로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수영한 적은 처음이었다. 롯데호텔에서 본전 뽑으려면 수영복이 필수다.




오설록과 카멜리아 힐에서 찍은 사진들(프사도 몇 장 건졌다), 마지막날까지 곽지 해수욕장에서 걸었던 시간들 모두 다 추억이었다. 나로 인해 남편이 뭔가 좀 느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무뚝뚝한 남편 대신 내가 시부모님께 그랬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여행 좀 자주 다니자고.



@ 이 글은 제 아내가 느꼈을 법한 생각을 제가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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