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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Jan 14. 2020

42.195 마이런

2020년에도 마라톤 / 호찌민 마라톤(2)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새벽 한 시 반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시간이니 잠깐 누워서 정신을 차린 후 그대로 일어나기로 했다

창가로 가 커튼을 열고 대회장을 내려다보는데 아직 조명이 안 들어왔다

느긋이 씻고 잠들기 전 미리 꺼내 정리해놓은 마라톤 세트를 장착했는데 이건 뭔가 약간의 의식과도 같다

이번에는 서울 하프 마라톤 때 받은 좋아하는 회색 셔츠를 준비해왔고 좀 더울 것 같기는 하지만 평소 즐겨 입는 레깅스와 땀을 닦을 수 있도록 레그 슬리브도 착용했다

땀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드 밴드를 착용하고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신고 끈을 바짝 조인다

 아미노바이탈과 포도당 캔디를 챙기고 나니 준비는 끝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여유 있게 스트레칭을 해 볼까

 사실 내겐 이 스트레칭이 굉장히 중요했다


실은 지난 타이완 마라톤 이후 3주 정도를 한 번도 뛰지 않았다

연말이라 바쁜 일이 많았기도 하고 타이완 대회를 끝으로 작년의 목표를 모두 이루고 나니 잠깐 방향을 잃어 달리기에 대한 흥이 끊겼었다

여러모로 지난가을에 미리 올해 초반에 뛸 대회들의 신청을 해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기분을 추스르고 올해의 달리기를 시작할 출발점이 이 대회라 좋았다

(만약 공항에서 보따리상이 뒤늦게라도 나타났더라면 난 이 땅을 밟지 못했을 거다)

 올해는 대회 참가 외에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우는 약간의 장치도 마련했다


기부 달리기


대회든 평소 조깅이나 가벼운 달리기 든 간에 달릴 때마다 거리 당 약간의 저축을 하고 연말에 기부를 하기로 스스로 약속을 했다

팀이 없는 개인 러너라 모아본 들 소액이겠지만 1년간 내 달리기 의지를 붙들어 줄 장치로 의미 있는 일을 해볼까 싶어 계좌도 따로 만들었다

내 지갑에서 나와 내 통장으로 들어가는 돈이라도 일단은 달려야 모이는 돈이니 진지하게 해 보기로 마음먹었고 그 첫 달리기이자 대회가 이번 호찌민 마라톤이다


내 기록에 기대 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 포기하지 말고 마음 편한 대로 달려 완주하자




한 시간쯤 공들여 몸을 풀고 천천히 대회장으로 나갔는데


.. 사람이 없다!!


어제 풀 마라톤 참가자의 배번이 한 움큼 밖에 안돼 보이더라니 ㅜㅜ

나만큼 피곤했을 남편은 꿈나라 여행 중이고 혼자 준비해 호텔 바로 앞의 대회장에 나와 마주한 대회장의 분위기는 미안하지만 내 기대에 한참을 미치지 못했다


'어제의 직감은 사실이었어

이대로라면 뛰다가 앞주자를 놓쳐 길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전적 있음)

아.. 진짜 망했다'

낯선 땅에서 혹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택시 타고 오라고 핸드폰 케이스 뒷면에 지폐를 넣어준 (지금은 자고 있지만) 남편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행히 출발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사람들이 좀 더 모여들었고 아쉽지만 모두가 풀코스 주자들은 아닌 듯 시간차를 두고 출발할 하프 참가자들도 섞여있었는데 클럽 소속이거나 혹은 동료 응원차 일찍 나온 참가자들 이었고 점점 도 올라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분위기에 섞여 들어갔다



시작은 새벽 네 시

출발선은 12분에 넘었다

다섯 시간을 다 쓰고 들어와도 호텔 조식 시간에 맞출 수 있다

재밌게 다녀오아침밥은 돌아가서 먹자


목표는 조식


다섯 시간짜리 시티런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어둡다


상당히 어두웠다


많지 않은 풀 마라톤 참가자 사이에서 이번에는 후발 주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정말 천천히 달렸다

지난 하루 사이 체험했던 호찌민의 도로는 달리기를 하기엔 위험하단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발 앞의 도로 상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처음에 함께 달렸던 페이스 메이커 그룹은 4시간 30분 그룹이었고 이들과는 10km를 달리고 급수대에서 헤어졌다

모두 잠든 새벽에 듣기 좋을 템포의 음악을 한 시간 가량 들으며 천천히 달리는 기분은 꽤 괜찮았다

주자가 많지 않아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주로 에 가파른 고가도로 왕복 코스가 포함돼있어 초반에 진을 빼고 말았고

함께 달리던 그룹에서 이탈한 후의 달리기는 꽤 외로웠다

11km에서 13km까지 스스로 의지 삼아 달렸던 주자와도 일찍 헤어진 후 40km 지점에서 다시 만났을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도중에 하프 주자들과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 헤어지는 코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외롭게 달리다가 우르르 그들과 엉켜 한동안 함께 달릴 때 묘하게 안심이 됐다

하프 부분의 참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풀코스는 참가자가 적은 대회의 패턴대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일찍 지나가고 평범한 참가자들만 드문드문 남아 뛰는 모양새라 내 코스를 이탈하지 않도록 (이 부분은 확실히 구분되어 있어 혼동이 없었다) 신경을 많이 썼는데 30km 지날 즈음 5km 부분 참가자, 어린이 걷기 참가자와 섞였을 땐 여러 상황과 맞물려 정신이 흐트러지는 기분이 들어 아찔했다


초반 코스가 험하기도 했고 무딘 내가 느끼기에도 공기 질이 나빴다

'이건 매연이야'라고 느끼면서도 계속 달려야 했던

급기야 오랜만의 달리기는 12km를 지나면서 가진 기력이 다 되어 지치고 말았다

하프 참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퍼지는 폼이 작년에 완주 실패한 경주 때와 비슷했다

솔직히 국내였으면 그만뒀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호찌민에 어떻게 왔는데


들인 노력이 얼마며 공항을 몇 번을 왕복해 지금 여기에 섰는데!!


오기도 나고 쉽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뭐 꼴찌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정도의 근성은 국내 대회에서 키웠지 않나

그대로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천천히 달렸다

내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부분이 이 대회는 거리를 매 km마다 표기해두지 않았다

넋 놓고 달리다 보면 3km가 지나있고 최소 2km씩 점프여서 그 부분을 의지로 삼았는데 은근 심적 도움이 됐다

20km를 지날 때쯤 해가 떠올랐고 땀이 주륵 흐르는 가운데 공포의 오토바이들이 주로에 섞여 들어왔다

대회 중이었고 교통 통제도 있었지만 후미 주자들에 대한 배려는 아쉬웠다.. 가 아니라 차 지나간다고 흐름 끊고 세울 때마다 숨을 고르며 그러려니 했다

대회 참가안에는 '통제 시간 안에 달릴 테니 그 시간 안에는 저를 보호해주십사' 비용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냥 그런 주자로써 이 정도 불편은 국내에서도 대회 규모에 따라 이미 많이 겪어 스스로 조심하고 차로를 가로지를 땐 스퍼트로 빨리 건너려 노력했다

10km 이후 20km를 지나기까진 내  능력이 풀코스에 미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절감했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에서 한 발 더나가 이미 마음으로는 은퇴 직전까지 다녀왔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가운데 해는 떠올랐고 거리 상  절반을 뛰었으며 뭐 어떻게든 들어가긴 하겠다는 확신이 섰을 때 비로소 걸음도 가벼워지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름 시티런이라 호찌민 푸미홍을 두 바퀴 돌게 되는데 여기가 한인 거주 지역이기도 하고 나름 여유 있고 조용한 구역이라 달리기를 하기엔 조건이 좋았다

(예를 들면 부대찌개, 육개장, 식욕을 끌어올리는 온갖 분식, 뚜레쥬르와 스타벅스!!)

순간순간 유혹이 정말 많았다

아까 지나갔던 길을 한참 지나 다시 지나간다

정말 좋았던 것은 급수대의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는 것인데 식히기 쉬운 500ml 페트병을 얼음을 가득 채운 다라(!)에 잔뜩 박아두고 물을 따라 주거나 때로는 보틀째로 내줘 큰 도움이 됐다

30km쯤에서 지났던 급수대에서 물을 받다가 어린 자원봉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쭈뼛쭈뼛해서 왜 그러나 싶었는데 다시 달려가는 내 등 뒤에서 크게 외친다

"아자 아자!"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한 번 외친다

(셔츠에 서울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아자 아자!!"

그제야 돌아보니 두 주먹 불끈 쥐고 웃고 있다 (심지어 남학생이다)

응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27km를 지나면서 드디어 풀 마라톤 주자에게 주어지는 기념 팔찌를 받았다


그래! 잘하고 있어!!




30km 직후 한 골목에서 에너지 넘치는 생기발랄한 무리가 나타났는데 5km 부분과 어린이, 걷기 부분 주자가 섞인 그룹이었다

이들과 섞이면서 급수대가 붐벼 건너 뛸 수 밖에 없었지만  판단 실수였다

이후  30km에서 35km 사이 목마르다고 온갖 짜증을 육성으로 쏟아내며 스트레스의 힘으로 다음 급수대에 힘들게 도착했고 여기서 500ml 보틀을 통째로 받아 안고 뛰었다

물이 많이 들어가면 달리기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차마 마시지는 못하고 품고 뛰다가 머리에 조그 뿌리고 목 한 번 축이고 버려야 했지만 잊고 있던 여름 달리기의 숨 가쁜 기억이 한 번에 확 살아났던 구간이었다


30km 이후


달리다가 발이 고장 나 신발을 벗은 주자를 봤다

저 사람이 며칠간 겪을 통증을 알아 찌릿한 느낌에 몇 번이나 돌아볼수 밖에 없었다


자원봉사자가 펼쳐놓은 수박을 받아먹는

지금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수박이다!!


스타벅스 앞을 통과하면서 진지한 갈등에 빠졌다

빨리 아이스커피 한잔 시원하게 말아달라고 해서 원샷해버릴까


35km를 지나면서 철수한 테이블에서 빈 맥주캔을 발견했다

딱 한 모금만 마셨으면!!!!

남편에게 전화했다

<나는  35km를 지났고 지금부터는 천천히 갈 계획이며 아주 차가운 맥주를 가지고 나오라고>



41km를 지났다

이 구간에선 앞서 비슷하게 달리던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했고 이들은 순간순간 의지가 되는 나의 러닝 동료였다


"진심으로 힘이 됐고 고마웠습니다"


마지막 커브 구간에서 길가에 앉아있던 남편과 만났다

바닥이 짜릿할 만큼 차가운 맥주캔을 건네는 걸 받아서 힘껏 흔들고 마개를 땄다

푸슝!!


넘치는 하얀 거품

앞의 기록은 될 대로 되라고 맥주캔을 흔들어 따는  주자(나)와 맥주를 건넨 남편, 거품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자원봉사자들

진짜 즐겁고 행복하단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마지막 주문을

"뛰어! 한 명이라도 제쳐!!"

아무 의미 없는 주문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을 위한 서비스로 힘껏 달렸다


피니시

선을 넘는 순간 장내 진행자가 내 이름을 불러줬다

" YONG AE LEE,  SOUTH KOREA!! "

풀 마라톤 완주에 대한 축하 멘트와 함께 메달을 받아 목에 걸었다


죽을 것 같다고 못 뛰겠다고 엄살 부렸지만 난 이번에도 완주에 성공했다



완주 후 받는 그 흔한 간식주머니도 없이 완주 티셔츠와 물 한 병을 받았고 그대로  부리나케 호텔로 뛰어갔다

조식 마감 40분 전이다

지금 가면 쌀국수와 볶음밥, 수박주스를 먹을 수 있어!

호텔 조식 식당엔 우리 말고도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고 서로 완주를 축하해주기도 하는 화기애애함 속에서 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 샤워를 하고 호텔 옥상의 수영장으로 향했다

낮잠보다는 수영으로 다리의 뻐근함을 풀고 싶었다

수영을 즐길 계절이 아니어서인지 수영장엔 우리밖에 없었고 따뜻한 햇빛 아래서 짧은 낮잠까지 즐겼다



수영장에서도 대회장이 한눈에 보여 그때까지도 달려 들어오고 있는 끈기 있는 주자들을 보며 내가 지나왔고 저 사람들이 막 지나왔을 길을 떠올리며 완주를 축하하는 작은 박수를 보냈다


기록은 5시간 7분

800명이 조금 넘는 참가자 중 667명의 완주

그중 357번째로 완주에 성공했으며 여성 러너로는 87명 중 47등을 했다고 한다

약간쯤은 더 괜찮을 수 있었지만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해외 마라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평소 초반에 꽤 기운이 있어 10km를 치고 나가 시간을 벌 어두는 편인데 이번에는 후미 페이스메이커 그룹과 천천히 달려봤다

얻은 결론은?

하던 대로 하는 게 나았다

천천히 뛰나 미리 좀 빨리 뛰어두나 나중에 힘든 건 마찬가지니 다음엔 내게 익숙한 방법대로 뛰기로 마음먹었다

여성 주자 중 최후의 완주자는 7시간 3분을 기록한 60대의 일본인

매연과 오토바이의 위협 속에서 끝까지 달린 근성에 존경을 보낸다

천 명이 채 안 되는 참가자들 속에서 잘 버텨낸 내게도 스스로 격려를 해주고 싶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따박따박 완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자신감을 준다

이제는 완주가 무섭지 않다


나의 첫 완주 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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