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결말포함]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당신은 어느 이야기를 선호하는가

by 뇨리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 없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영화를 먼저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영화의 실제 배경이나 줄거리까지 쓰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심층 리뷰와 감상평 위주로 쓰려고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전부터 봐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야 추천을 받아 본 것이 후회될 정도로 연출, 장대한 영상미, 내용 측면에서 모두 예상을 한참 넘어섰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이 영화를 통해 '삶과 종교, 인생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와 같은 심층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와 동시에 우리들이 선호하는 이야기와 이야기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파이의 2가지 이야기: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선호하는가?


영화의 주요 스토리는 파이와 가족이 탄 배가 침몰하면서 파이가 부모님을 잃고 표류하면서 겪은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두 번 들려주는 파이의 이야기는 이 영화의 메시지와도 강하게 연관된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다만, 반전보다는 메시지가 더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① 첫 번째 이야기 : 동물들이 나오는 표류 이야기

파이가 표류하면서 겪은 극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이다. 폭풍 때문에 침몰하는 배에서 홀로 구명보트에 올라탄 파이는 배에서 구명보트로 떨어지다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무심코 구하게 된 최상위 포식자 '리처드 파커', 바나나 더미를 타고 표류하던 오랑우탄, 그리고, 보트에 숨어있던 난폭한 하이에나와 함께 표류하게 된다. 표류하던 동물들과 파이는 배고픔에 허덕이게 되고,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차례로 공격해 죽인다. 그리고, 리처드 파커가 하이에나를 물어 죽이면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 둘만의 표류가 시작된다. 육식동물인 리처드 파커 때문에 파이는 보트와 연결된 작은 보트로 옮겨 타고, 낚시와 날치 떼를 통해 얻은 물고기로 점차 리처드 파커를 길들인다.

라이프오브파이1.JPG

폭풍 속에서 표류하던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어떤 섬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있었고, 수많은 미어캣들이 곳곳에 있었다. 파이는 그곳에서 잠깐의 휴식을 즐긴다. 밤이 되자 그 섬은 모든 생물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식인섬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다시 바다로 나선다.

라이프오브파이2.JPG

그리고, 한참을 바다 위에서 떠돌던 파이는 이윽고 멕시코 만에 다다르고, 사람들에게 구조되었다. 그리고, 리처드 파커는 파이에게 작별 인사도 남기지 않고 숲으로 사라졌다.


② 두 번째 이야기 : 보험조사원에게 들려준 표류 이야기

파이가 타고 있었던 일본 회사 소유 배의 침몰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보험조사원 두 명이 구조된 파이를 찾아온다. 그들에게도 파이는 똑같이 첫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보험조사원들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진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파이는 '현실적으로 그럴듯한 스토리'를 들려준다.



네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보트에 타다 다리가 부러진 불교신자였던 선원, 난폭한 주방장, 튜브를 붙잡고 구출된 파이, 바나나 더미를 붙잡고 떠다니다 구해진 파이의 어머니다. 선원의 다리는 심하게 감염되었고 주방장은 굳이 나서서 그의 다리를 잘랐다. 그 상처로 결국 그 선원은 죽었고, 주방장은 그의 시체를 낚시 미끼로 썼다. 어느 날 파이의 실수에 주방장이 파이를 때리자 파이의 어머니가 강하게 막아서며 파이를 뗏목으로 보냈다. 그 순간 주방장이 그의 어머니를 찌르고 보트 밖으로 던졌고, 파이는 그의 어머니가 상어 떼에게 뜯어 먹히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파이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 굶주림에 파이는 결국 시체를 잘라먹기에 이른다. 악마 같은 사람이 파이까지 악마로 만든 것이다. 그 후 홀로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파이는 한 해안에 다다르며 구조된다.



이야기를 들은 소설가는 자신이 들은 두 이야기를 되뇌인다. "얼룩말과 선원 둘 다 다리가 부러졌고,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였으니 그럼, 하이에나가 주방장이군요? 선원은 얼룩말이고, 어머니는 오랑우탄이고, 선생님이 그 호랑이군요."


파이의 2가지 이야기 중 어떤 스토리가 더 나은가(Better Story)?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이 실수하는 부분은 이 영화를 반전영화로 보고 끝낸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가서 두 번째 이야기가 가히 충격적이고, 연출적인 측면에서도 인물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면서 카메라가 zoom in하면 관객은 그 이야기를 진실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감독이 그렇게 의도한 측면이 있지만 반전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야기 이후 소설가와 파이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영화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파이는 묻는다.



"두 가지 버전의 스토리를 들려주었는데, 배가 침몰한 원인은 설명 안 되고, 어떤 게 사실인지는 아무도 입증 못 하죠. 두 가지 스토리 모두에서 배가 침몰하고, 가족이 죽고 난 고통받아요.", "그렇죠."



"어떤 스토리가 맘에 들어요(Prefer)?"

"호랑이 스토리요. 더 흥미롭거든요(Better story)."

"고마워요."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사실처럼 들리냐고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야기 모두에서 파이가 겪은 상황과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바다 위에서 어떤 일이 있었겠지만 아무도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거짓과 진실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대신, 파이는 어떤 이야기가 더 맘에 드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를 선택하는가? 사실처럼 보이는 두 번째 이야기는 매우 건조하고 끔찍하며, 더욱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어찌 보면 가족을 잃고 채식주의자임에도 육식을 해야만 했던 비극적인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 나약한 인물이 그러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대신에 첫 번째 이야기는 숭고하고, 장대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고, 잔잔한 감동과 수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다.


어릴 적 수많은 동화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 이야기의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이야기란 사실의 여부보다는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종교와 동화, 위대한 소설 등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관적으로 선택되고, 이어져 내려옴으로써 생명력을 갖게 된다. 영화에서 두 번째 이야기는 약 5분가량으로 매우 짧다. 반면 첫 번째 이야기는 1시간 10분가량으로 매우 방대하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을 수많은 의미 있는 이야기로 채우게 되면 내면이 더욱 확장되고, 깊어지게 될 것이다.




삶(Life)과 생명(Life)에 대한 이야기: 파이와 '종교'


이 영화의 제목인 <Life of Pi>는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참 잘 지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Life'는 '삶''생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미 모두 영화의 주제와 깊이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영화의 내용 전체는 '파이'라는 한 사람이 살아온 극적인 인생(Life)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초반부는 파이가 이제껏 믿어온 3가지 종교를 나열한다. 영화 내에서 신도 결국은 누군가를 통해 소개를 받아야 한다는 대사를 통해 종교도 이야기의 형식으로써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파이는 그의 어머니를 통해 처음 힌두교를 믿게 된다. 그리고, 12살 때 형과의 내기에 의해 들어간 성당에서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예배 소리에 이끌려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파이는 힌두교의 비슈누 신을 통해 '믿음'을,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알라 신을 통해 '평화'를 배웠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어떤 이야기가 있을 때 사람들은 진실 여부에만 집중할 때가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중에서 종교는 가장 핫한 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증거를 대면서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파이의 아버지처럼 이성을 믿으라고 조언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야기와 연관 지어 종교에 대한 의견을 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파이의 아버지를 통해 종교에 맹목적인 믿음을 경계하면서, 어머니를 통해 마음속 중요한 것들에 대한 길을 찾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파이'의 이름 또한 매력적이다. 원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이것은 파리의 한 아름다운 수영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물이 너무나 맑아 마치 하늘에서 수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의 이름은 영어로 '오줌 싸다(Pissing)'과 유사하게 들리기 때문에 학창 시절 많은 놀림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파이(π)'라고 바꾼다. π는 비순환하는 무리수이다. 즉, 무한히 이어지면서도 규칙이 없어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을 표현한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끝없이 바다 위를 표류하는 파이의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Life가 인생 외에도 '생명'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이다. 즉, <Life of Pi>라는 제목은 '파이의 생명'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실제로 바다 위에서 파이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던 이유는 리처드 파커를 돌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의 트라우마를 극복시켜 줌과 동시에 그의 인간성을 지켜주면서 내면을 포함한 생명 자체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피신'이라는 이름처럼 우리가 삶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가장 깨끗한 수영장 물로도, 반대로 인도의 누추한 화장실 물로도 변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도 우리 삶에서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나아가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


이 영화에서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리처드 파커는 사실 호랑이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새끼일 때 목이 말라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다 사냥꾼에게 잡혔기 때문에 '목마름(Thirsty)'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동물원에 등록하는 과정에서 잡은 사냥꾼과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의 두 이야기에서도 나오듯이 '파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파이는 성당에 들어가 성수를 마시는데 신부가 다가오면서 'You must be thirsy'라고 말하며 물을 건넨다. 이것은 '너 목마르구나'라는 의미와 동시에 '네가 thirsty겠구나'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파이도 목마름이란 이름과 어울린다. 목마름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영화적 상황과도 연결되면서 파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삶과 정신적인 갈증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바다 위에서 파이는 내내 리처드 파커와 동행한다. 리처드 파커는 하이에나를 물어 죽였는데,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유추해 본다면 호랑이는 파이의 내면에 있는 공격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이 두려워했던 주방장도 죽일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초반에 동물원에 호랑이를 보러 갔던 파이를 그의 아버지가 쫓아와 호되게 혼낸다. 호랑이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린다. 하지만, 영화에서 파이는 리처드 파이로 표현되는 자신의 내면을 길들여가고, 결국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도 내면의 호랑이를 동물원 창살로 가둔 채로 억압할 것인가, 길들임으로써 친구가 될 것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라이프오브파이3.JPG


리처드 파커는 마지막에 작별 인사도 없이 숲으로 사라졌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의 흉포한 야생성이 사라졌다고 보이기도 하고, 모든 소중한 관계의 유한성에 대한 비유로도 보인다. 게다가, 숲 속으로 사라진 리처드 파커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예상치 못하게 끝난 관계는 아쉽고 서운하기도 하지만, 계속 기억하게 됨으로써 더욱 마음속에 남기도 한다. 리처드 파커는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마음속에 생명력을 갖고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라이프오브파이4.JPG


연출적인 측면


영화에서는 익스트림 롱쇼트의 부감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압도적인 시각 효과를 전달함과 동시에 마치 파이를 지켜보고 있는 신의 시점 쇼트로도 보인다. 파이가 항상 신을 바라보고 매달리는 것처럼 신도 카메라를 통해 항상 파이를 지켜보고 파이의 인생을 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 위에 비친 하늘을 떠다니는 보트는 마치 무한한 우주 속을 나아가는 인생의 모습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파이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 위에 비친 하늘을 항해하는 장면과 물아래에서 찍어서 하늘을 헤엄치는 장면들은 파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면서 우주의 삼라만상과 내면의 여러 감정들을 동시에 체감하게 한다. 마치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슈누 입 속의 우주의 모습을 아름다운 영상미로 그리고 있다.

라이프오브파이5.JPG


작가의 이전글[영화/관람평/스포없음] 아바타: 불과 재(2025)